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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불범정 邪不犯正 - 나는추측이조아

 

 

 

(※본 글은 실제 인물, 지명 및 사건과 관계없는 창작물임을 알립니다.)

 

 

  서역에서 학문이 들어올 적의 일이다.

  전란의 불길이 한차례 백성을 태우고 지나갔다. 사람과 집과 비명이 모두 불에 의해 타들어갔다. 챙길 수 있는 정신머리도 가정집기도 유실된 시대에 도달했다. 타고 남은 자리는 텅 비어 다만 잔인만이 남아 있었는데, 거기에 새로이 두려움과 불신과 혼란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높은 청기와집 용궁 나리들이 애민하지 아니하여 땅이 가물고 역병이 도니 사람이 죽어나가노라, 궐기와도 같은 목소리가 드높았다. 이 땅에 도는 소문이고 상소이자 사실이었다.

  사람들에겐 믿어야 하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정신을 붙잡고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설령 제 마을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이름 없는 나무라 하여도 좋고 누가 깎았는지도 모를 다 풍화된 석상이어도 좋았을 터다. 이건 영혼이 생존하고자 하는 문제였다. 이미 타버린 죽음은 좋은 비료가 되어 삿된 것을 삿되지 않은 것으로 둔갑시키고, 그걸 위해 또한 새로운 삿된 것을 만들고 있었다.

  모름지기 좋은 것을 만들려면 일단 나쁜 것부터 만들어야 했다. 액막이처럼 말이다.

 

  질서가 있던 시절이 무질서한 시절로 역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살아있는 그 누구도 여론의 흐름을 말릴 수 없었다. 민심의 가뭄이 범람해 가는데 어느 누가 손쓰겠는가. 옳은 방향으로 바로잡기에는 청기와집 비단 도포 사람들도 토혈을 쏟고 있었다. 그리고 끝내 손을 놓고 만다.

  철의 시대가 청동빛으로 녹슬고 있었다.

  녹슬어가는 시대의 면면은 어떠한가. 이미 예절이란 이름의 오래된 녹을 타 먹고 있는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새로운 것에 눈을 돌리는 이들도 있었다. 서역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학문 중 쓸 만한 것이 있으리라. 엄숙한 나무 조각이 낯설고 새로운 언덕 앞에서 또한 앞장서기 시작했다.

 

  세상에 온갖 게 뒤섞인 무속이 넘쳐 흐를 때 엄숙한 이들이 말하길, 악마라. 그러나 차마 몸에 붙은 불을 끄지 못한 백성들은 그것을 귀 기울여 듣는 대신 낫을 들었다. 서역에서 학문이 들어올 시절의 일이었다.

 

-

 

  새붉은 머리를 한 아이가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수탉의 피와 같았고, 눈은 부서지는 햇빛을 한껏 받는 봄철의 새싹과 같았다. 맑은 눈을 보고 아이의 부모가 말하기를, 영혼의 창이 깨끗하다며 아이를 조금 귀여워하기도 하였다.

  아이의 부모 된 자는 마을에서 무당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아이 역시 그 일을 세습해야 했기 때문에 나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부모가, 아이가.

  아이는 그러나, 자라는 그 짧고도 긴 시간동안 신병조차 앓지 않는 강건한 아이였다. 지나치게 강건한 나머지 신병의 신호조차 아이에게는 오지 않았다. 이는 곧 하늘의 두레박이 될 수 없는 존재라 여겨졌기에, 아이는 물에 하루 종일 온몸을 적셔도 보고 산길 언저리를 굴러도 보았다.

  감기 몸살도 걸려 보고 온 몸이 돌부리와 나무뿌리에 긁히고 까져 상처투성이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바라는 신은 대답 하나 없었는지 조용하기만 했다. 적어도 주변인들이 보기에 아이는 실패작 처럼도 보였다. 신을 받지 못하는 아이, 그게 그 붉은 머리였다. 쓸모없음에 지쳐 가는 눈초리는 더이상 아이를 보듬지 않았다. 늘 어디선가 다쳐 오는 아이를 그저 천치로만 여길 뿐이었다.

 

  앓기 전에 지나간 줄은 모를 것이다.

 

  대신에 아이는, 사랑의 열병을 앓았다. 어린아이는 흘러넘치는 사랑에 대한 열병을 앓고 있었다. 타고나길 그리 태어났는지, 애틋하고 무른 열병은 자신보단 타인에게 열꽃처럼 무언가를 피워냈다.

  그 온기는 남들보다 조금 더 따듯하였으며, 타인을 어여뻐할 줄 아는 이의 온기였고, 저보다 작은 존재를 세심히 볼 줄 아는 이의 온기였다. 아이는 또한 그렇게 흘러내리는 온기를 채 다른 사람에게서 채우지를 못하고 있었으나,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영혼을 조금씩 태워 가며 저리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러했다.

 

  이 쯤부터 아이는 자신을 아프게 하는 대신 타인을 일으키는 일에 더 흥미 붙인 사람 마냥 굴었다.

 

  자신에게 내려진 상황이 냉골과 같은 처지임을 알면서도 가여운 일에 눈물 흘릴 줄 아는 아이. 저에게는 언젠가 대답해 줄 이 존재한다 생각하여 남을 긍휼히 여기는 아이. 그 아이와 눈을 마주하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마땅하다 여기는 의젓한 아이가 보일 것이다. 차가운 손길에 내던져 졌으리라 생각되는 아이는 그 누구보다 따뜻한 빛을 품은 채다.

  영영 열병을 앓다 죽을 아이. 신에게의 대답을 간절히 바라는 아이. 타인이 보기에 아이는 의젓하나 불쌍하고 가여운 천치였다.

 

  붉은 머리를 한 소녀는, 그 동네에 들른 흰 사자 머리를 한 의원의 제안으로 마을을 벗어났다. 서학에서 온 종교는 모든 이에게 대답해 줄 것이리라 제안하자 소녀는 어린 양과 같은 표정을 하며 얼마 안 되는 제 짐을 쌌다. 고집스레 상처를 달고 지내도 우는 아이에게 소매를 빌려주던 아이 치고는 선선한 반응이었다.

  흰 사자 의원은 그런 태도에 의문을 품기 보다는 아이가 영민하고 똑똑하기 때문이라 결론 지었다. 그 맑은 눈이 무엇을 담았는지는 몰랐을 것이다.

 

  아이의 눈가를, 차가운 손이 늘 덮어주는 줄도 모를 것이다.

 

  소녀는 마을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르고 싶은 곳이 있다 하였다. 신에게 오랫동안 매달린 이유가 거기 있었다. 벼락을 맞아 죽어가던 묘목이 얼마나 더 살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소녀는 깨끗한 얼굴로, 흰 사자 의원에게 그렇게 이유를 댔다.

 

  원한다면 소녀는 신에 대한 소망을 품지 않았을 지도 몰랐다. 강신 받지 않는 사람은 곧 일반인이나 다름없으며, 또한 무속이라는 크고 무거운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에서 피로 이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눈이 트인 아이 하나를 입양해서라도 대를 잇는다. 다른 세상을 보는 눈끼리 엮여 새 가족을 이룬다. 세상에 온갖 삿된 것들이 새로 생긴다 하더라도 그들의 위치는 매우 굳건했다, 아니 어쩌면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 집착했을 터다. 그런 집착에서 벗어나는 건 다행일 지도 모른다.

  의원은 무속의 굴레에서 소녀가 벗어났다 여겼으나 소녀는 그렇지 아니했다. 아이가 열병에 시달려 잠을 일찍 깼을 때마다 눈을 마저 감기는 차가운 손의 주인을 그녀는 여전히 모른다. 의원이 오기 전날 밤에, 그 사람을 따라 마을을 뜨라 말한 이를 그녀는 모른다. 마을을 뜨기 전날 눈을 덮어 열을 식히며,

 

  무구가 있는 장소를 말하는 이를, 그녀의 신을, 이제 소녀는 만나러 가고 있다. 흰 저고리에 여름 바지만을 입고 산길을 내달려.

벼락 자국이 선명한 어린 묘목에게 작게 제의를 올리며. 그리 인사를 하면서.

 

  영혼이 타들어가듯 사랑을 한 아이의 혼백은 실상 처음부터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열기를 내리누르던 누군가가 어느 날 작게 감탄할 정도로.

 

-

 

  소녀의 신은 생각보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듯하였다.

  아이는 흰 사자 의원의 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흰 사자 의원은 사람 여럿을 여읜 과부나 마찬가지였는데, 언문을 알아 풍월을 읊기 시작하고, 흘러 들어온 서역의 학문을 구해 오니 그것이 퍽 즐거웠다 한다. 하여 노쇠한 몸이 되어 의원 일도 하게 되었노라 마루에 앉아 차를 마시며, 그녀는 제 역사의 목간을 말로 꿰어 들려주었다.

  흰 사자 의원은 이 곳으로 온 아이에게 서역에서부터 온 종교를 알려 주었다. 안에 담고 있는 가치관이 그들이 사는 곳과 사뭇 달리하여, 알음알음 관심 있는 이들이 녹슬기 시작한 세상에 땜질할 납이라도 되는지 살펴보러 온다 하였다. 아이에게 권유한 이유는 그저 순전한 것이다, 아이에게 그런 야박한 작은 세상은 맞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단풍을 닮은 고운 빛의 머리칼에, 초목 끝자락 새잎사귀를 닮은 눈이 그러했다. 아이에게는 저 같은 어른 말고도, 오랫동안 기댈 수 있는 어떠한 버팀목이 필요했다. 이 땅에서 나고 자란 무속에게 크게 화를 입은 아이라면 의원이 내릴 처방전은 얼마 없었다.

 

  엄숙한 목재 조각 속 겸허함이 그녀의 인생 곁을 함께 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늘 베갯잇 속에 제 신의 무구를 넣어 놓고 잔다.

  그녀의 신은 이전보다 조용하였으나, 여전히 익숙한 찬 손으로, 아직 기도 시간이 아니라며 새벽에 일어난 그녀를 도로 눈 감기곤 하였다. 몰래 새근새근 자는 숨소리를 내며 그 손이 내려가길 기다려도, 어느 순간 정말 잠들어 버려 그녀는 그녀의 신을 볼 수 없었다.

  고사리 같은 작은 손만이 잠꼬대에 꼼질거린다. 소녀는 옅은 웃음소리를 듣지 못한다.

 

-

 

  의원 댁에 종종 소문이 돌았다. 방바닥이 덜 달궈졌다 싶은 날에 불을 만지러 가면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와 같은 인물이 나뭇조각을 불에 먹이고 있다는 괴담이다.

  이런 소문이 흉흉하게 공간을 지배하는 까닭은 여기 들리는 이들 중 제법 많은 이가 새로운 종교에 다니고 있는 탓이다. 그 사람들은 이 수상하기 이를 바 없는 존재를 불길하다 여겨 점점 악마라는 미명을 붙이기 시작했다. 단순히 아궁이를 건드렸다는 이유 만으로, 장작을 먹여 외려 다 식은 바닥을 달궜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만일 그 자가 지나가던 선량한 존재라면 통탄 스러워 할 일이렷다.

  물론 그걸 다 차치하고도, 검은 옷을 입은 수상한 존재가 불을 때고 홀연히 종적을 감춰 버리니. 꼭 귀신을 연상케 함은 부정하기엔 그른 일이다. 오로지 학문만 하는 이들 마저도 그것 혹시 망량 아니오, 하고 물어보기도 하였다..

  혹은 도깨비라거나, 혹은 주방신께서 쇠락하는 세상 모습에 다 타먹은 옷을 입고 오신 게지. 저들끼리 시끄러운 가운데 의원은 미간을 꾹 눌러 짚었다. 그녀의 온 몸과 얼굴 전부를 흰 털이 뒤덮어 주름은 보이지 않았으나 미간에 곱게 파이는 골목은 숨기기에 힘들었다. 한쪽 구석에서는 세상이 끝이 보여 염라대왕이 사자를 보낸 것이라 떠들기도 하였다.

악마라. 저승사자라.

 

  소문이 잡히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의원이 직접 나서서 잡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원이 나서지 않는 이유는, 그 모습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이의 방에 불을 더 때야 겠다고 생각했을 즈음에.

 

  그러고 보니 유난히 더 스산한 날이었다.

  어떤 이가 아이의 방 앞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단언컨대 처음 보는 자였다. 익숙치 않은 그림자는 밤손님보다 달갑지 않았다. 누구지? 공포가 그녀의 피부를 훑고 머릿속을 이리저리 뒤섞었다. 소름이란 것이 이토록 아프게 돋을 수 있나, 살을 에는 추위를 이런 식으로 느낄 수 있나.

  그녀는 비명을 지르려 하였으나 누군가 그녀의 목소리를 누르는 마냥 아무 소리도 나지 아니하였다. 다만 앉은 이는 의원을 발견하자마자 불쑥 일어나 멀대 같은 덩치를 과시하며 그대로 집의 뒤로 사라져 버렸다.

  도둑인가? 도둑이야? 그녀는 우선 아이의 걱정부터 하였다. 뻣뻣하게 굳은 몸을 이끌어 아이의 방에 목을 들이밀면, 아이는 다친 곳 하나 없이 세상 모르게, 고른 숨소리를 내며 그녀가 가진 온기를 함뿍 이불 속에 품은 채 자고 있었다. 흰 사자 의원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안도감이 봄을 닮은 아이에게서 불어왔다.

 

  그렇다면 그 자는 어디로 갔는가 하였더니, 별안간 불똥 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자를 따라 부엌으로 가면 손부채를 팔랑이며 불을 확인하는 예의 검은 옷을 입은 자가 있다. 이번에도 그녀는 목소리 하나 낼 수 없었으나, 대신 눈 정도는 굴릴 수 있었다. 면면히 살필 시간이 주어졌다 생각이 들었을 때 그녀는 불 앞에 허름히 앉은 자를 살폈다.

  그 자는 무예를 하는 자의 옷을 입고 있었다. 새벽녘 햇빛을 받아, 행색 속에 분명히 할 수 있었다. 어깻죽지나 허리깨에 언뜻 보이는 깨지고 상처투성이인 갑옷 일부를 그녀는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녹슬지 않은 쇠의 빛깔 밑에 있는 검은 천은 하늘거리는 비단은 아니라 할 수 있었다. 그 옷감은 차라리 거칠게 직조된 철릭에 가까웠다. 그리고.

  말라붙은 피를 언뜻, 찢어진 옷 사이의 삼베 조각에서 본 것 같다 여긴 순간 눈 앞의 거한은 귀신보다 더 조용히 사라졌다. 불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서툴게 돌본 흔적이 남아 나무 정리가 덜 된 채로, 그러나 불씨만은 생생히 살아 타고 있었다. 허억, 꿈도 아닌지 이렇게 숨을 소리 내어 들이켜도 의원은 그 자리에 홀로 망연히 서 있었다.

  새벽녘 찬바람이 불에 풀무질을 하였다. 찬바람은 의원의 당혹을 냉혹으로 바꾸어 놓고 그대로 달음박질 쳐 사라졌다. 땀과 피가 식는 듯하였다.

 

  그 날 본 어느 남루한 자는 다만, 쇠를 닮았고 또한 재를 닮은 절반과, 밤의 자락을 닮은 나머지 절반을 길게 머리칼로서 늘어뜨리고 있었다. 흰 사자 의원은 차라리 불을 좋아하는 도깨비에 한 표 걸으리라.

 

  그러나 검은 옷차림과, 도저히 사람이라 여기기 힘든 묘연한 행적 때문인지 점차 이 소문은 그 자를 악마로 만들고 있었다. 발단은 어김없이 의원 댁에 찾아오는 신흥 종교 사람들이었다. 빛을 좇는 이들에게 검고 어두운 것이란 악마나 다름이 없으며 의원 댁에 악마가 들어 왔노라고, 어서 성수를 집안 곳곳에 흩뿌려야 한다고 난리를 부렸다.

  다른 이들이라고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이래봬도 의원의 집이었고, 의원이란 생사의 사이에서 사람을 구제하는 일을 하는 직업이다. 그러니 이런 소문이 붙은 것을 환영하는 이는 없었다. 무속 이야기가 나오고 굿 이야기가 나올 때 흰 사자 의원은 집 안의 붉은 머리를 한 아이를 떠올렸으나, 이내 지웠다.

 

-

 

  아이는 여느 때처럼 제 눈을 가린 차가운 손을 느꼈다. 크고 차가우며, 늘 제가 잠이 부족할까 염려하는 다정한 손. 일어나야 한다고 칭얼거리고 싶어도 낮게 가라앉은 음색이 달래어 왔다. 그러고 있자면 아이는 순식간에 잠에 들곤 하였다.

  하지만 오늘, 그녀의 신은 아무 말도 없이 조용하였다. 아이는 의원님의 집에서 떠돌기 시작한 귀신과 악마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했다. 신께서도 그 마귀를 잡는 데에 열심이실까?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수마에 빠져 들었다. 아이는 오늘 아무런 말조차 하지 않은 신이, 형체조차 모르는 신이 마귀를 잡는 꿈을 꾸었다. 미움 받은 자는 침묵을 지킨 채다.

 

  꿈을 꾼 소녀는 일어나 새벽기도를 나섰다. 방의 바닥은 홧홧하고 따스했다. 누군가의 다정이 온기로 화한다면 이럴 것 같아, 소녀의 이른 아침은 오늘도 맑고 또한 밝았다. 나갈 채비를 위해 흰 저고리 위에 푸른 장옷을 걸쳐 입은 소녀는 작은 걸음으로 기도실까지 종종걸음을 뛰었다.

  기도실도 소문으로 가득하다. 비록 작은 기도실이지만, 의원님의 집에서 신세 지는 여러 환자의 가족들로 안은 가득하다 못해 입구까지 사람들이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작은 별채를 서역 종교인을 위해 내어 준 흰 사자 의원님의 자비와 별개로, 그 의원님을 의심하는 듯한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의원님이 악마와 손을 잡았다는 둥, 귀신이 나타난다는 둥. 저승사자가 의원 댁에 치료받는 사람들을 데려가려고 미리 불을 때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거나 사실은 의원이 죽인 사람이라 이승에서 한 명이라도 더 데려가기 위해 한을 갈고 있다거나.

  세상에, 기도실에서 퍼질 말인가? 아이가 놀라는 동안 황토로 칠한 벽 위에 걸린 엄숙한 목재 신상은 엄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따라 새벽 기도를 담당하는 이 역시 주의에 가까운 당부를 하였다. 이 공간을 내어 준 분께 대체 무슨 예절이냐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해 이리 죄를 쌓느냐고. 옹송그린 사람들은 모두 침묵으로 대답하였다.

  아이는 맑은 눈으로 문 밖에서-사람이 정말 많아 공간이 없었다.- 기도를 올렸다. 신이시어, 부디 모든 이들이 불안을 씻고 험난한 시간을 견디게 도와 주시기를. 아프고 다친 이들을 도우시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시기를. 아이의 사랑의 열병은 돌봐주는 이가 붙어 더욱 따스함에 불을 붙였다.

  그 날의 기도는 어느 때보다 좀 더 길었다. 새벽이 아침이 되고도 남을 때까지 하늘에 대한 고백이 이어졌다. 고해성사 시간도, 그 곳이 고해실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채찍 같은 마지막 설교 끝에 사람들은 흩어질 수 있었다. 아이도 제 장옷을 주섬주섬 챙겨 쓴다.

 

  자주 들르는 신자 한 명이 아이의 정체를 대수롭지 않게, 그러나 소소하게 나마 궁금해하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

 

  여러 춘추가 흐르고 아이가 말쑥한 숙녀가 되는 동안 소문은 사그라들었다. 대신 그녀는 모르는 새로운 소문이 두 손바닥쯤 되는 땅의 의원 댁을 불길하게 핥고 있었다.

  아이가 온 이후로 그런 저승사자가 온 거라면 그 애가 문제 아니오? 의원님이 문제가 아니라면 그 애한테 뭐가 있겠지. 그 애, 어느 골에서 신병에 걸린 채로 왔다는데? 의원님은 그걸 모르고 데리고 오신 거야? 세상에. 악마를 들러 붙이고 온 거나 다름이 없잖수?

  사람들은 의원 댁에서 나는 모든 문제를 의원에게 돌리기보다는, 점점 만만한 대상을 찾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그 붉은 머리의 아이였다. 아이는 단지 먼 곳에서 왔다는 이유로, 그 시기와 이 집에 괴한이 나타난 시기가 딱 들어맞지는 않으나 겹치기는 한다는 이유로 먹잇감이 되었다. 미사를 주도하는 사람은 늘 경고하였고 집의 주인인 흰 사자 의원은 그런 말을 하는 이에게 족족 장침을 보여주는 등 하였다.

  도움이 안 된 것은 아니다. 소문이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나지도 않았고, 쌓인 말이 사람을 잡아먹어 무너뜨리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성장하는 그 기간에도 소문은 산 속의 작은 물줄기처럼 조용히 흐르고 있었고, 성인이 되는 어느 시점부터는 범람 직전까지 가기도 하였다. 어느 정도로 퍼졌는가 하면 소문을 퍼뜨리는 이들 끼리도 서로 눈치로 대화할 정도였다. 아이만 모르면 되는 거 아냐, 하는 순진하고도 꽤 먹혀 들고 있는 생각이었다.

  그래, 먹혀 들고 있었다. 어느 정도는 말이다.

 

  그 아이는, 새붉은 머리칼을 가진 아이는 오늘도 기도를 하였다. 어린 양들에게 축복을. 죄 지은 자에게 자비를. 간악한 자에게 엄벌을.

  기실 그 소문을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소녀는 저가 붉은 과녁이 된 줄은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베갯잇에 넣어 둔 딱딱하고 무거운 쇳덩이를 꺼내 보았다. 크고 무거우며, 반으로 잘려 나간 검의 절반. 손잡이가 있는 검의 절반은 그녀가 여지껏 베갯잇 속에 감춰 두고 꽁꽁 숨겨 놓아도 녹슬지 않고 먼지조차 쌓이지 않은 채,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도화 속에 박제된 것처럼 반뜩였다. 금방이라도 피를 머금을 형상이나 또한 자세히 보면 한없이 단정하였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신에게는 소망하기만을 하였지 무언가를 채 기도해 본 적이 없던가. 어리석구나, 어리석어.

  부디 그 모습의 한 일부라도 보기를, 하였던 어린 날의 깊은 투정은 이제 묻을 때가 되었다. 그녀는 이제 주변을 둘러볼 줄 알고, 귀 기울이지 않아도 될 말을 구분할 줄 알며, 업을 쌓는 자에게 신께서 자비를 내리길 생각하는, 아주 작은 성전에서 빚어진 어엿한 사제였다.

  하니 그녀는 스스로의 소망보다는 좀 더, 다른 이들과 모두를 위한 기도를 올리고 싶었다. 그녀로서는 그게 맞다 여겼다. 엄숙한 신상에게 그리 기도를 올려도 부족하였다. 불온한 소문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한다면, 하여 의도치 않게 그들의 영혼에 하늘이 눈살 찌푸릴 흉이 생긴다면. 그건 목자가 되어서 제대로 일을 하지 않은 셈이지 아니한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짚어 본다. 분명 그녀가 아직 의원님의 집으로 오지 않았을 때, 어머니가 어찌 하는 지를 본 적이 있었는데. 어떻게 시작을 했더라. 머릿속에는 눈과 동백꽃을 닮은 옷자락이 스쳐 지나가기만 하였다. 어떡하지. 방울소리가 낡은 기억 속에서 울렸다. 그런 도구도 옷가지도 하나도 없는데.

  …물그릇. 물그릇? 아, 밤에 하늘에 기도를 올릴 때 물을 떠 놓고 기도를 한다 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제 방 문을 살그머니 열었다. 누군가의 속삭임이었는지 구분조차 하지 못 한 채로 말이다.

  반지르르한 툇마루에 달이 그대로 비치고 있었다. 이런 한밤중에 방 바깥을 나서는 건 고뿔 드는 일이니 그러하지 말라, 의원님이 몇 번 이야기 하시긴 했지만, 생각난 때부터 해야 조금의 부족함이라도 더 메울 수 있지 않겠는가. 하여 그녀는 문을 연 소리 만큼이나 살금살금, 발 끝으로 걸어 가며 주방으로 갔다.

  사위 고요하고 그림자만이 가득 차 있었다. 타닥타닥, 방을 데우는 불만이 아궁이 속에서 목소리 내며 불을 밝혔다. 그러고 보니 집 안을 돌아다닌다고 하더라도 앞길 밝힐 불빛 하나 안 가져왔구나. 다음부터는 방 안의 등잔이라도 들고 나와야 겠다, 싶었다.

  아궁이가 혀를 차 순간 길이 밝아진다. 훅 끼친 열에도 아이는 놀라지 않고 성큼성큼 목표한 것에 가까이 한다. 이내 그녀의 손에 차가운 놋그릇이 닿는다. 미적지근한 감촉이 꼭,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온도이다.

 

  물 담을 놋그릇 하나를 물독의 차가움에 적신다. 깊이 담군 것을 도로 빼내면 찰랑이는 물이 그릇 안에 가득하다. 그 표면에 보름이 얼굴을 들이민다. 찰랑거리는 물에도 꿋꿋하게 둥근 형상을 유지하면서 희미한 등불처럼 그릇 안을 비친다.

  그릇의 무게를 느끼며, 그녀는 방 앞에 도착한다. 마루에 올라가야 하나 망설이다가, 물 속에서 달이 휘영청 손짓하자 마루 앞의 작은 마당에 우두커니 선 채다. 이윽고 붉은 머리칼이 몸을 숙인다. 땅에 찰랑거리는 그릇을, 그녀의 영혼처럼 무거운 물그릇을 두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두 손을 모은다.

  이름 모를 제 신께 기도하니, 이 곳에 들락이는 해괴한 존재를 무찔러 주십사, 다른 이들로 하여금 소문을 퍼뜨리는 일 없게 하시어, 그들을 죄에서부터 지켜주시길.

  여전히 새싹과도 같은 파릇함이 감도는 두 눈은 간절함 속에 눈꺼풀 뒤로 사라진다. 저를 믿는 이에게 처음으로, 아주 작은 제의를 받은 신은 저를 뫼시는 무당의 부탁에 고민을 하였다.

 

  그거 난데 이를 어쩌나.

  타닥, 불씨 튀는 소리가 났다. 아궁이에서 꽤 멀어진 채임에도, 물그릇을 바로 앞에 둔 채임에도 불티가 나무 갉아먹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놀라 붉은 머리칼이 하늘로 빼끔 솟으면.

  물그릇에 검은 옷자락이 순간 비치다 말아 버린다. 그릇 위에는 반쪽짜리 검이 어느새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햇빛을 받은 마냥 빛나는 녹색 눈이 순간 어리둥절함을 담는다. 이내 만면에 퍼진다. 어라.

  물그림자에 비친 저승사자가, 아니 악마가, 아니 그러니까.

  소문의 그 사이하다 여겼던 존재가 저가 믿던 신이라고? 그녀의 눈이 몇 번이고 눈꺼풀 뒤로 숨었다 다시 나타난다. 구름 한 점 없어 달은 여전히 작은 수면 위에 비치건만 아이의 눈은 그러지 못하는 채다.

  그녀는 빳빳하게 굳었다가, 불지도 않던 바람이 별안간 훅 끼쳐 아궁이서부터 온기를 전하는 열풍에 놀랐다가, 이내 꾸물꾸물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거주춤한 자세는 차라리 나았다. 얼굴은 멍한 것이 꼭 꿈을 꾸다 만 사람 같았다.

  아니, 일어나지 말고! 아이의 안쪽에서 목소리가 쩌렁히 울린다. 저가 믿던 신에게 오욕을 선사하는 불경을 저질렀다면 죄송하다 하여야지! 순간 빨갛게 물든 귀 끝이 느껴졌다. 이건 송구스러운 것이다.

  절대로 쪽이 팔이거나 그런 것이 아니다. 아무튼 그렇다.

  그녀는 다시 한번 절을 하였고, 신은 열풍을 손짓하여 그녀의 머리칼을 간지럽혔다. 이제 알았으면 되었지. 나붓한 바람이 볼에 닿아 간지럽힘에, 밤공기에 차게 식은 뺨이 데워졌다. 참으로 다정한 온도다.

  이때껏 달궈진 온돌의 온기 만큼이나 다정한 온도다. 양 주먹을 꾸욱 쥔 그녀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죄송해요, 하고 소근거렸다. 놋그릇에서 작게 쇠 우는 소리가 들렸다. 운다기 보다는, 물방울이 맺혀 똑똑 떨어지면서 나는 소리에 가깝다.

  팔랑, 잎사귀 하나가 물그릇 하나에 얹어진다. 작은 파랑이 일어남에, 그건 어쩌면 신이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양 주먹이 더욱 꼬물거렸다.

 

  적어도 신은 제 사제에게 만큼은 미움 받지 아니한 모양이다. 조용히 속삭여 받아 낸 사과는 오랫동안 삭은 절명한 영혼들의 넋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히기에 충분하였다. 너는 나를 유일하게 환영한다. 그리고 그것이 참으로, 기껍다. 온갖 멍에에 익숙한 존재였지만 환대는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처사다.

  그렇다면, 이제사 알려줘야 할 것을 네게 이르노니, 공을 치하하는 겸을 하여.

  비록 이것이 치하가 아님을 알지만. 새벽의 시간을 즐기던 신은 다시금 쇠와 같은 온도를 뒤집어쓴다. 냉혹한 그림자를 스스로에게 덧씌운다. 오늘 너에게 들려줄 것이 많구나, 그러고 싶지 않음에도.

 

  신은 그녀에게 비극을 보여 준다. 새벽녘의 꿈에서, 천기를 감히 누설하여서.

 

  벼락 소리가 일었다. 신벌의 소리다.

 

-

 

  서역에서 학문이 들어올 적에, 녹이 슨 예절을 숭상하는 이들은 서역의 종교를 못마땅히 여겼다. 예를 갖추는 방식이 이미 체계적으로 잡혀 있거늘, 어찌 이 땅도 아닌 먼 타향에서 온 사상이 그 뿌리를 뒤흔들려 하느냐면서 말이다. 얼마나 모욕된 처사인지 사흘 밤낮을 고할 수 있다 하는 호통소리가 참 불퉁했다. 오랫동안 사회를 지탱해 온 질서는 선악의 구분이 어려웠으나, 새로운 것의 배제는 민생안정의 명목 하에 참으로 쉬우니.

  불타버린 대지 위에 뿌리내린 혼돈을 잠재운다 하여, 불온한 세력을 바로잡겠다 선포하고 그 방향을 저들에게 돌려 버리면 지지 받는 신흥 세력도 순식간에 흩어져 버릴 것이다. 이미 메마른 민심을 받을 생각일랑 없는 자들은 청동빛 정맥이 여기저기 튀어나온 천치이다. 자리 하나 꿰어 차 곰팡이가 필 때까지 눌러 앉은 자들이다.

 

  대지 위에 피가 흩뿌려지고 검은 이끼와 독을 품은 버섯이 자라기 시작한다.

  강을 타고 피가 흐른다. 그 피에서부터 뿜어지는 불길이 네 앞에 올 것이다. 도망치거라, 아이야. 도망쳐야 해.

 

  어서.

 

-

 

  붉은 머리의 사제가 숨을 몰아쉬며 일어난다. 손끝이 잘게 떨린다. 이를 붙잡아줄, 도로 눈을 가려 잠에 들게 해 줄 신은, 비정하게도 곁에 보이지 않았다. 허억, 들이쉬는 숨이 거칠다. 흐르는 땀이 차갑다. 그녀는 방에 홀로, 땅에 흐르는 피와 불꽃을 붙잡고 있었다.

  신이시어, 어째서? 새하얘진 머릿속이 신을 부르짖는다. 전 무얼 하면 되는 겁니까? 새순 같은 눈에 뜨거운 이슬이 맺혀 흐른다. 뚝뚝 떨어지는 모양새를 본다. 전부, 물방울이 흩어지듯이, 저렇게.

신의 대답 대신 바깥서부터 거센 강풍이 인다. 문이 뜯어질 듯 덜컹거리다가, 이내 활짝 열려 주변 사위를 방에 도셔놓는다. 영산 어드메의 숨막힐 듯한 녹음이 흐려진 눈 안에 가득 찬다. 그 사이로.

빛이 보였다. 아이의 눈에 빛이 보였다.

 

  흰 사자 의원 댁에 급격한 괴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거기 있던 붉은 머리 아이가 이상해졌다고. 여기서 당장 도망치라고, 여길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라고. 가파른 산등성이를 가리키며 도망치라 며칠 내내 온 동네방네를 천방지축처럼 돌아다니고 있다고.

  미친 사람처럼.

  세상에, 역시 거기 있던 건 아이한테 붙어 온 악마가 분명해. 의원 댁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애초에 제 어미를 이어 신을 받았어야 했는데 여기로 온 건, 신을 못 받고 잡귀가 붙어 온 것 아니겠소? 의원 나리도 그동안 숨기느라 얼마나 애쓰셨을꼬. 에잉, 쯧쯧.

  붉은 머리의 사제는 그 모든 걸 지나친다. 저런 말에 걸려 넘어져 지체할 시간이 촉박하다. 아윽! 그러나 사제는 제 장옷을 밟아 휘리릭 앞으로 넘어진다. 깔깔깔, 웃음이 번져 나간다. 사제를 제외한 그 곳의 모든 이들에게 웃음이 퍼진다. 동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장옷 안에 있는 가여운 이를 갉아먹으려 한다. 파란 장옷에 날캄한 웃음소리가 배였다. 함에도 그녀는 일어난다. 흙먼지를 털 듯 웃음소리를 훌훌 털어낸다.

  저기 뒷산 가파른 곳에 빛이 보인다고 그녀는 밤새도록 덧붙여 갔다.

 

  흰 사자 의원은 맨 처음 그 말을 들은 장본인이었다. 처음에는 그 말을 말 그대로, 들었다 수준으로 넘어갔다. 그녀가 거둔 아이가 사제가 되어 하는 말이 예언과 꿈 사이의 무언가라 생각이 들었을 때, 이때껏 보호자 역할을 해 준 그녀로서도 아이의 말과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운 짝이라.

  그러나 어떤 소식통에 의하면 청기와집 인간들이 관군을 풀어 한다는 짓거리가, 도를 넘어 색출과 사살의 단계에 이르고 있다고. 부디 몸 조심하시라 함에 의원은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것이 무엇인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일단 모든 것의 이전에 아이가 들어왔다.

  아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모두 여기에 있으면 죽을 게 분명했다. 흩어지건 뭉치건 살려면 도망쳐야 했다. 저 멀리서 아이의 외침이 들렸다. 흙투성이로 푸른 옷을 모두 엉망으로 하고 온 사제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저 아이의 말에 힘 실어 줄 이가 필요하다. 또한 조용하고 은밀히 빠져나갈 길을 꾸릴 사람도. 살기 위해서.

  붉은 머리의 사제가 이미 뒷산을 지목했다면 최대한 멀끔하고 동시에 인적 드문 길을 고르고 골라야 했다. 으음, 흰 털이 수북한 두꺼운 손이 이마를 짚는다. 그게 가능하기야 하겠는가.

 

  의원 나리? 그 날의 늦은 밤에 손님이 왔다. 예의 소식통이다. 암녹색이 꼭 숲을 닮아 그 속에서 사라질 것만 같은 이다.

 

  자네, 하고 부르면 그를 식별하기 가장 쉬운 요인인 고양이 귀가 쫑긋, 하고 대답을 들었다 표시한다. 그 난리통에서 엷은 핏물 묻은 쪽지까지 보내 놓고 용케도 살아 돌아온 이였다. 그를 어떻게 반기지 않을 수 있겠냐마는.

  상황이 안 좋습니다요. 나직이 말하는 투가 여상하여 외려 범상찮다. 그래, 그가 살아있음은 달리 말하자면 그를 쫓던 존재들까지 지척에 깔렸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선뜻 그를 반기는 것이 과연 괜찮은가, 의문이 들고 만다. 그러나 창가 곁에 가까이 가자 풍기는 피비린내에,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조금 놀라며 들어오라 하면 그제야 소식통은, 살수 일을 하던 소식통은 걸음 소리 없이 귀신처럼 들어온다.

  귀신입니까! 사제는 그리 말하며 의원님의 방에 한달음에 들이닥쳤다. 저가 믿고자 한, 그러나 비극만을 보여주는 존재인지, 아니면 그 비극이 바로 코앞으로 닥쳐왔는지. 사제는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신이시어, 당신은 귀신이십니까? 어째서 그런 광경을 제게 보이십니까? 벌게진 눈으로 사제는 드물게 큰 소리를 내었다.

  그리하야 들이닥친 곳에는 암녹색 고양이를 적당히 닮은 청년 하나가 환부에서 피를 덜어내짐 받고 있었다. 꼬리가 바짝 놀란 채로.

 

  “아, 니… 당신은 누구입니까?”

  “의원 나리, 저 샌님 같은 사람이 그.”

  “맞네. 자네, 이 사람은 나에게 이곳 저곳의 정보를 전달해 주는 이일세. 그리고 저 아이는 내가 저쪽 골에서 거둬 온 아이이고, 이제는 사제라네.”

 

  서로에게 간단한 소개를 한 흰 사자 의원은 암녹색 소식통의 환부를 꼼꼼히 마저 살폈다. 빠르게 움직이려면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릴 지도 모르겠다. 소식통이 여기까지 당도하는 동안 생겼을 일들을 새삼 상상해 보다가 이내 지운다. 그보다는 최대한 피를 멎게 하고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이 먼저다.

  옅게 구겨지는 미간을 보았는지, 소식통은 바람 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여기로 오지 말 것을 그랬습죠?”

  “무, 무슨 소릴 하는 거냐! 그렇게 다쳐 놓고 의원님 댁에 안 올 생각을 하다니!”

  “저 샌님이.”

 

  지금 당장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데, 그럼 당연히 저 같은 다친 사람은 짐짝이 됩니다요. 담담히 스스로를 버리는 패처럼 취급하는 이다. 차분한 그 말을 들으며 새싹을 닮은 두 눈이 흔들거렸다. 저 말은 근처까지, 우리의 턱 바로 밑까지 위험이 깔려 찰랑거림을 뜻한다. 이성적으로는 그리 생각했다. 이성만 그랬다.

  그리고 신에게 늘 어린 양을 굽어 살피사 자비를 갈구하던 그녀의 심장과 감정은, 그가 스스로를 버리라 은근히 돌려 말하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 생각을 열심히 해 보라고. 살아있는 이 순간에 왜 죽음을 바라보냐고. 처음 보는 상대임에도, 처음 보기 때문에 더욱 더 윽박지르고 싶었다.

 

  “짐은 안 될 겁니다. 저 그래도 나름 해먹던 놈입니다?”

 

  아직 때 타지 않은 표정을 마주한 소식통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이에 더욱 분통이 터진 사제는.

 

  “…살아있으면 모두 짐이 아니다!”

 

  일갈하고 만다. 그러나 소식통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통을 이 악물어 참아 가면서 말을 잇는다.

 

  “예에. 영산 골짜기 쪽에 길이 보였다 한 사람이죠, 그 쪽이? 그 쪽 길은 어떻게든 터 볼 테니까요.”

  “괜찮겠나?”

 

  짐짓 태연한 말이나 따라붙는 질문은 다급함을 숨기지 않는다. 흰 사자 의원은 모든 것에서부터 촉박함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환자의 상태부터 살피는 행동이란 참.

  후우, 심호흡을 마저 한 소식통은 제 암녹색 머리카락을 털어내듯 벅벅 긁는다. 가능한가, 그렇지 아니한가. 재어본다, 경험에서부터 나오는 계산을 머릿속에서 해 본다. 길지 않은 침묵이 추웠다.

 

  “사람들 속에 섞여 살아 남는 짓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요. “

 

  나온 대답에 냉철과 각오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길 고르는 게 제 전문 아닙니까? 의원 나리는 사람들만 모아서, 자시 子時 가 되거든 출발하십쇼.”

  “자시?”

  “예. 지금 그렇게 태평하게 있을 시간 아닙니다.”

 

  나갈 사람은 얼른, 빨리 나가십쇼. 그 말에 사제는 얼른 자리를 비우고야 만다. 붉은 머리의 사제는 해가 다 떨어진 밤에, 온 동네를 기어이 다시 제 목소리로 꽉꽉 채워 밤잠을 깨우기를 선택했다. 흰 사자 의원이 암녹색 소식통의 상처를 마저 살핀 뒤 가세하였다.

  그러함에 사람들이 마침내 영산 가파른 골짜기로 향하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 봇짐을 싸 둔 영리한 이들부터, 기껏 챙긴 짐이라곤 책 한 권에 가마솥 하나뿐이라 학문이 밥 멕여주냐 농 쳐도 이상할 것 없는 이까지 다양했다.

 

-

 

  “샌님, 뭣합니까? 왜 안 가요?”

  “사람들이 아직 도망을 다 못 가지 않았나!”

  “허이고 세상에, 진짜 샌님이네?”

  “그러는 넌 왜 뺀질거리기만 하고 안 가나!”

 

  암녹빛의 소식통은 본래 사람들의 길을 터 주었어야 했다. 그리고 행렬 사이에 숨어 부상자 답게 안전히 또한 얌전히 위험지역을 벗어났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이리 저리 고양이 귀를 쫑긋거리면서, 가장 후미에 남다 못해 길 초입에 들어갈 생각도 없어 뵈는 사제의 근처를 맴돌고 있지 않은가.

  저 뺀질이가! 봄의 싹을 닮은 눈이 와락 화를 담는다.

 

  “쉬잇, 뭔 말 하려는 지는 알겠는데, 댁은 의원 나리가 거둔 사람입죠?”

  “그렇, 다만.”

  “…의원 나리네 사람은 챙겨 가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샌님, 빨리 오세요 그냥.”

 

  허나 그 뺀질이는 화를 낼 틈조차 주지 않고, 빽빽한 산세의 시작점에서 외려 그녀를 종용하고 있었다. 어차피 오는 사람들 중 몇은 끝내 따라 잡혀 죽는다. 말 아래 깔린 뜻이 무엇인지 자명했다. 자간 사이에 죽음이 선득했다. 그녀는 그러나, 그럴수록 더더욱 버티고 싶어졌다. 설령 그녀를 미친 사람이라 한 이들이라도 살 사람은 살아야 했다. 버릴 목숨은 단 하나 없노라, 의원님께 배운 지혜요 엄숙한 목재 조각의 신이 이야기한 진리다.

  카랑! 그녀는 사물놀이패가 버리고 간 징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방향을 계속 알렸다. 이 곳이라고. 그 소리가 정말 주먹으로 때리는 게 맞는지, 쇠와 쇠가 서로 부대는 소리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커 사람들은 그녀를 보는 족족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 뒤편에 선 뺀질이는 슬슬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리 큰 소리가 나면 안 된다니까.

 

  “아이, 진짜! 빨리 와요!”

  “아니! 너가 먼저 가라! 나는 괜찮다!”

  “뭐가 괜찮아요! 의원 나리가 안 괜찮아 하실 거라고요!”

 

  대체 뭘 믿고 저렇게 뻗대는 거야? 그는 녹슨 예절을 믿는 인간들이 종종 저리 뻗대는 작태를 보았다. 검 앞에서건 뭐가 됐던 간에. 뒷배가 먼저 앞서 갔는데 여기 버티고 서서 뭘 더 하겠다고. 어차피 여기서 있으면 꼬리 자르기 당해서 죽는다. 그렇게 소리 크게 울릴 도구를 들고 있으면 더욱 그렇다고!

  녹슨 예절만큼이나, 서역 종교가 그녀에게는 그렇게 작용하고 있는갑다. 그럼 그냥 뒷목 팍 쳐서 들고 튀어야 하나?

 

  아, 이미 늦었다. 마을 사람의 것이 아닌 횃불이 순식간에 온 마을을 점령하기 시작한다. 이거 봐. 빨리 가야 한다니까. 뺀질이는 이마를 팍팍 치면서 판단이 늦은 작금을 후회했다. 이제 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겠냐마는 적어도 저 징을 뺏건 아니면 끌고 가던 했어야 했다. 아니, 그 이전에 다치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그 전에 저가 먹잇감이 되어서라도 여기로 오는 저 군관들을 다른 길목으로 홀렸어야 했다!

  집들이 불탄다. 지푸라기가 오랜 시간동안 함께 했던 이를 위해 제를 지낸다. 향과 같은 연기가 매캐하게 하늘로 날아간다. 아직, 아직 아주 늦지는 않았다. 빨리 가야 한다. 빨리.

 

  “와요 그냥.”

  “아직 안 된다, 저기…!”

  “빌어먹을, 그럼 내가 갈 테니까! 댁은 지금 징 들었잖아요! 내가 더 빠르게 도착한다고!”

 

  뺀질이가 새되게 소리치며 어깃장을 놓았다. 이윽고 그는 다친 몸을 날래게 놀리면서 가장 후미에 있을 사람들을 보러 가기 시작했다. 확실히 소식통을 하던 이의 몸인지라, 붕대 감은 몸이라 할 지언정 굼뜨다 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그는 시야에서부터 멀어진 채다. 하지만 그 뺀질이는 처음 다쳐 왔을 때…

 

  ‘아무래도 여기로 오지 말 것을 그랬습죠?’

 

  …자신이 고집을 부려 누군가를 사지에 몰아넣고 말았나? 신께서 정녕 이런 결과를 바라셨나? 아둔하기 짝이 없다. 징을 울리던 손이 멈추고 고개가 푹 수그러든다. 최선의 일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저 모두를 지키고 싶을 뿐이었는데. 타인에 대한 깊은 이타심이 뿌리처럼 자란 아이가, 무력함에 숨 조여 옴을 느껴 손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이대로, 정말 이대로 있어야만 합니까? 신이시어, 정말 제 길이 이러합니까? 하늘은 대답하지 아니한다. 엄숙하고 엄격하며 자비로운 신은 목재 신상 속에서 빛만을 비출 뿐이다. 지금도 영산 골짜기에 환한 빛이 그녀의 눈에는 보였다. 신이시어, 정녕, 저 뒤에 오는 이들을.

  그럼에도 그녀는 그 침묵을 제 나름대로 해석한다. 이는 시련입니까. 저는 그렇다면 헤쳐 나갈 것입니다. 또한 지킬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도리이고 사람됨이며 가르침이기에.

 

  너가 정녕 그리 느낀다면, 가거라. 그녀의 등을 두드리는 듯한 순풍이 불었다. 끝내 머리카락은 붙잡고 싶어하는 손길을 닮았다.

 

-

 

  급히 뛰쳐 가며 그녀는 불씨에 부러진 장대 따위를 주웠다. 적어도 누군가를 상대해야 한다면 보잘 것 없다 한들 몽둥이라도 필요했다. 불붙어 중간이 끊어진, 어느 집의 얇은 기둥 일부였을 장대를 들고 그녀는 뛰쳐 갔다. 희미한 불씨가 끝에서부터 아롱거린다. 그 불씨만이 작은 희망인 것처럼.

  숨이 턱 끝에 매달린다. 심장이 쿵쿵 뛴다. 빗장뼈 안에 든 모든 장기가 부풀었다 줄어들기를 반복한다. 허억, 허억, 숨을 거칠게 쉬며 대피줄의 후미로 가면 거기에는, 사람들을 다른 안전한 곳에 숨겨 데려가려 하는 소식통이 있다.

  똑똑한 이다. 불씨가 반짝이는 장대를 등 뒤에 숨겨, 그녀 또한 어둠에 녹아들어 보았다. 그러려고 했는데.

 

  으아악! 별안간 비명이 들려온다. 누구의? 왜? 당혹에 온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움직여야 하는데. 움직여야 해. 이곳으로 오기까지 당차게 부풀었던 용기가 바닥을 기고 있나? 심장 소리만이 그녀의 귀를 멍멍히 울리고 있었다.

  이어서 쇠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징을 울리는 소리와 다른, 귓속을 에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에 그녀는 꾸역꾸역 정신을 차렸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 어렴풋이 그 형상을 보았다. 소식통이다. 암녹빛을 숨길 곳 하나 없는 자가, 칼부림을 하고 있었다.

  이 마을을 덮친 이들로부터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그는 부상자다.

  퍼뜩, 의원님 집 안에서 본 상처들이 떠오른다. 흥건한 피가 선연히 머릿속을 적신다. 저리 두는 것은 스스로가 용납이 되지 않는다. 그녀는 천천히, 그러나 낼 수 있는 것 중 가장 빠른 발놀림을 걸음에 섞는다. 마을을 불태운 연기는 그녀의 머리칼 또한 불꽃인 양 가려주었다.

  가까이서 본 소식통은 마치 살수처럼 이리 저리 움직였다. 다친 몸 때문에 그의 다리가 부들거리고 있었다. 어둠과 연기 속에서도 꼴이 선명히 보였다. 저건 비단 부상 때문인가? 사람은 공포에 내몰려도 몸을 떨곤 한다. 그녀의 턱이 파르르, 떨리는 것처럼.

  그러니까 저 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현실로 다가온 공포가 제 숨을 잡아먹을 적에, 신께 기도를 올린다. 저에게 용기를, 저 사람을 가혹한 환경에 내몬 대가를 치르러 왔나니, 저에게 용기를.

 

  순풍이 분다. 순간 연기가 적에게 덮쳐 든다. 연기 속에 뒤섞인 붉은 불꽃이, 그녀의 머리칼이 휘날렸다. 불씨가 살아있는 장대가 기침하는 적 하나의 옆구리에 쑤셔 박힌다.

  으아악! 이번 비명은 그들이 보호하고자 하는 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장대가 한 번 더 부러져 짧아짐을 보았다. 단말마와 동시에 으스러진 장대는 이제 길다고도 못 하는 수준이었다. 소란에 적들은 이 곳으로 올 것이다.

  괜찮다. 야밤에 광명이 든 녹빛 눈이, 살수의 모습을 잠시 살피다 이내 그를 제 뒤에 세운다. 징의 매듭을 한 손에 잡은 그녀는 다른 이들이 오기 전에 코 앞의 적들부터 무너뜨릴 심산이다.

 

  “미쳤어요?”

  “그럼 부상병을 어찌 그냥 보내나!”

  “시이발, 진짜.”

 

  살수가 단검-제법 큰 편이라 장검이라 해도 속아넘어갈 법한-을 다시 고쳐 쥐었다. 둘 모두,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공포는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적들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홀로 있지는 않으니 괜찮다.

  숨이 정돈되면 떨림이 잦아든다. 그녀는 짧은 침묵을 넘기지 않고 그대로, 악기였던 쇳덩이를 적의 머리통에 적중 시켰다. 창 따위를 들고 어설프게 방패와 같은 걸 든 사람에게 접근한 벌이다. 우스꽝스럽게도 그 울림을 시작으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퇴로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안 튀었냐고! 살수는 후다닥 도망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짜증스럽게 중얼댔다. 진작 좀 튀었어야지, 아까 연기가 호륵 하니 덮쳤을 때! 조잘거리는 태도를 보니 한결 여유를 찾은 듯싶다. 사제는 그렇게 조잘거리면서 능숙하게, 제가 때려눕힌 이의 바로 뒤편으로 날아들어 칼날이 박힐 곳을 정확히 찾아 찌르는 자를 보았다.

  살수 일을 하였느냐 묻는 때는 조금 나중이 되겠구나.

  그럴 것이다. 소란에 몰려 드는 적들이 느껴졌으니까.

 

  “넌 도망쳐라.”

  “헛소리 하지 마십쇼. 의원 나리가 살아서 보자 하셨습니다요. 그 쪽도.”

  “나는 아마도 살 것이다!”

  “뭔 근거로 그러냐니까요?”

 

  목을 가린 의복이나, 살수의 목이 드러난다면 필히 핏대가 서 있겠거니 싶다. 속삭임이 이렇게 크고 또박또박히 들릴 일인가. 살수는 말을 더 이어 보라고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꿈질거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가만히 웃었다.

  이래서 무언가를 강렬히 믿는 사람은 무서운 거다. 살수는 골때림이 두통까지 심화되지 않아 다행이라고 여겼다. 두통이 생기기 시작하면 지척에서 오는 가볍고 살기 흐르는 기척 하나 놓치기 참으로 쉬워지니까.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어떠한가. 괜찮은가? 두 명을 미끼로 쓴 채 사람들은 달아난 것이나 진배없다. 그리고 두 미끼는, 저희는 어쩌면 생애 마지막 대화라도 나누는 꼴과 마찬가지였다. 그럼 방금 나눈 시덥잖은 말이 유언인가, 살수는 물러설 생각 없이 그렇게 골몰했다. 여기서 발 빼면 그는, 그러니까, 저 사제의 유언을 유일하게 들은 인간이 되겠지.

  그건 싫다. 은혜 입어 피 묻은 손을 붕대로 씻었는데. 방금 전에도 큰일이 벌어질 뻔했지. 아무렴, 싫다면 싫은 거다. 제 온 몸을 덮은 어두운 그림자와 달리 저 사제의 눈에 들이친 태양과 같은 광명을 본 순간부터 결정한 사안이었다. 살아서 보낸다. 살려서 보낸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

 

  화르륵, 집들이 무너진다. 불에 탄 집들이 이제 더는 형체조차 유지할 수 없다는 듯 허물어진다.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를 토해낸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불씨가 꼭 죽을 자리를 찾아온 불나방처럼 보였다. 이내 흩어진다, 아, 저것이 우리일까. 하늘로 흩어지는 모양새가 꼭 그리 보이지 않던가.

  사위는 다시 한번 칠흑만치 검다. 밤을 비추는 달마저 이를 전부 비출 수 없을 터다. 길을 점지한, 엄숙한 신의 형상이 내린 빛조차도. 두 사람은 다만 적들 또한 어둠에 집어삼켜진 작금에 조금의 감사를 했다.

 

  감사하지 말아야지.

  누군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대체 누가? 사제는 순간 제 바로 등 뒤에서부터 무언가, 거친 바람이 말 그대로 그어졌다는 착각을 받았다. 바람이 그어진다? 아니, 이건, 바로 옆 살수의 능숙한 칼부림을 목격할 때와 비슷하다. 그보다는 더욱 더,

  거칠다. 동시에 무겁다. 또한 정제되었으며, 그리고.

 

  연기 속에서 일던 조용한 잔기침 속에 비명이 섞이기 시작한다. 명백하게, 저 검은 연기 사이로 뼈와 살을 헤집고 다니는 이가 존재했다. 너울거리는 연기가 형체를 짐작하게 할라 치면, 어느샌가 다른 곳에서 피냄새가 풍기기 시작해 또다른 공포에 휩싸이게 만든다.

  단말마가 끊김이 없다. 숨이 쉴 새 없이 끊어지고, 소리가 채 이승을 떠나기도 전에 다른 이의 저승길이 새로 개척된다. 불씨가 하늘로 날아오른다. 검은 연기가 모든 피를 숨기려 한다. 살이 잘리고 뼈가 부숴지는 소리가 지척이다.

 

  화악, 일순 모든 연기가 걷힌다. 숨결이 트이고 시야가 트인다.

  피가 흐르는 땅의 중심에, 남루한 옷을 한 형체가 있다. 철을 닮은 머리카락 한 쪽이 흩어지는 연기를 따라 밤하늘에 수놓인다. 달이 그 실에 일일이 제 빛을 별박는다. 그리 하면 드러난 어깨에, 허리깨에 다 깨진, 그러나 녹슬지 않은 철의 갑옷이 보인다.

  검은 연기를 닮은 나머지 반을 보이지 않으려는지, 그 자는 칼을 닮아 날카로운 눈초리로 두 사람을 훑다 다시 매캐해지는 연기 속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의 온 주변은 저승사자가 형을 강제로 집행한 듯 시체만이 낭자하다.

 

  사제는 그의 모습을 안다. 아니, 안다기 보다는, 이건 일종의 직감이다. 신을 섬기는 자로서의 직감.

  순풍이 불어온 곳에서부터, 제 등 뒤에서부터 시작된 생명의 수확이라니. 저가 메고 온 봇짐 안에는 유물과도 같은 검 뿐이다. 반이 부러진, 손잡이와 검의 몸집 일부만 남은. 신께서 예언컨데 피가 강을 이루어 흐르고 불이 생명을 집어 삼키리라, 허면 그 예언을 역순으로 일으킨 저 사람은.

 

  제가 모셔야 하는 신이 아니라면 누구인가. 악마란 말인가?

 

  “잠깐, 어딜 가시는 겁니까!”

  “…아, 그! 대피로는 반대입니다요!”

 

  그리 외쳐도 돌아오는 이 없이 메아리만 울렸다. 그들을 찾기 위해 산길을 걸어 내려온 흰 사자 의원만이 그저 뒤늦게 발걸음 했다.

 

-

  많은 사람이 다쳤지만, 모든 사람이 살았다. 숨기 위해 흩어지는 길에 다친 이들이 피를 흘린다 하더라도 추격은 당분간 없을 성 싶다.

  하지만 그들이 환영 받을 수 있을까. 쫓기는 자들 중 누군가가 한탄하길, 이렇게 되면 본가에도 못 간다고, 본가로 갔다가 삼대가 죽을 지도 모르겠다며 술을 물처럼 들이켰다. 막막함이 사람들의 발목을 점차 쥐어 흔들고, 생존의 달콤함은 빠르게 현실의 씁쓸함에 씻겨 내려갔다.

  상처가 생긴 사람들 중 누군가가 끝내 숨을 거두었을 때 그 속도는 더욱 박차가 가해져 갔다. 죽음을 목도했을 때의 먹먹함이 소리를 없앴고, 현실을 깨친 죽은 눈이 시야를 가렸다. 희망에 대한 허상이 낙엽 같은 소리를 냈다. 바스락, 생 하나 끊어지는 소리가 잔인했다.

  숨 내쉬는 소리 하나 없이 고요만 내려 앉은 산길은 그들이 도열한 곳이다. 나무가 빽빽함에도 건조하기만 한 공기는 호흡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산을 타는 것이 아니라 절망의 벼락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 한 자락이 덧입혀 지기 시작할 무렵, 의원이 짧게 사인을 작성하고 유가족에게 예우와 유감을 동시에 표했다. 살려 내라 울부짖는 소리가 산짐승을 닮아 들킬 일 없겠다고 살수는 버석하게 읊었다.

  상처가 상처를 낳고 있다.

 

  “제를, 제를 지냅시다.”

 

  하여 사제는 나섰다. 엄숙한 신께서 용납치 않으시더라도, 그것이 금지된 율령임을 알아도. 살아남은 이들 중 절반이 제를 반대할 어린 양임을 알아도, 그들에게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죽은 이와 산 자를 위로하는 제가 필요했다. 살아남음에 부디 희망을 가지라 하기 위한.

 

  산기슭 어딘가에 제대로 된 봉분 없이 묻힌 이를 위해, 설움을 달랠 술을 뿌린다. 흩뿌려지는 술과 닮은 무곡을 춘다. 돗자리 하나 없는 기슭의 흙바닥에서 붉은 머리는 그 자체로 삿된 것을 이 자리에 초대하지 않겠다는 양 흔들거린다. 북 없이, 낡은 칼 반쪽이 명징한 쇠울림을 내면서.

  그 날 본 존재 또한 죽어가는 이에게 슬퍼하고 있을까? 곁눈질로 배워 조금 어설픈 태 나는 무속의 춤 속에서, 춤 추는 사제가 칼을 보며 생각했다.

 

  쇠는 물이 잘 맺히는 성질을 가졌다. 그 때문인지 이슬이 금방 맺혀 별안간 물방울이 후둑 떨어졌다.

  물자국이 달을 그린다.

 

-

 

  새붉은 머리에 새싹과도 같은 눈을 한 사제는, 그 이후로도 서역 학문을 따르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모질디 모진 핍박에서부터 사람들을 구하기로 하였다. 이유를 그녀에게 나열하라 한다면 첫째로, 마을에서 도망친 이들을 계속해서 쫓는 자가 있었으며 또한 다른 마을에서도 박해당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 할 것이고, 둘째로 신께서 이를 막으라 저에게 사명을 주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녹슨 예절을 따르는 이들만 탓할 요량이냐면, 사제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절 책망하던 살수, 아니 소식통의 눈빛이 무엇을 뜻했는지 절절히 느낄 때가 종종 있었다. 살아남아 여생을 이어감에 대한 희망보다 죽음으로써 신에게 더 가까워질 것이라고 하는 이들.

  청동으로 녹슬어 가는 자들이 청기와집 꼭대기에 있다면 저 사람들은 흙과 구리 색으로 슬어 부서지는 모양새였다. 철로 쌓인 지 오래 된 문명이 퇴색된 채로, 사람들 사이에서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심지어 서역에서부터 온 새 문물 조차도!

  그러나, 그러나, 그녀는 사람들을 구하는 행각을 멈출 수 없었다. 신에게 기도를 드리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질문을 간곡히 하여도 돌아오는 답은, 글쎄. 사명이라 받은 것도 실상 그녀가 스스로 이름 붙인 것뿐이다. 그러나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은 죽을 수도 있는 이들을 건져내는 일이다. 그것이나마 할 수 있어서 그녀는 다행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이로 하여금 사람들의 생각이 조금은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또한 바래 본다.

 

  그녀는 오늘도 두 신께 기도를 올린다. 새벽에 일어나 엄숙한 목재 동상의 신에게 한 번, 자기 전에 놋그릇에 비친 달 속에서 검을 든 그녀의 신을 위해 한 번.

 

  비친 물그림자 속에서 신은 감히 속삭인다. 너의 후회를 어찌 막을 지 모르겠노라.

 

-

 

  사람들을 보호하고자 함이 이다지도 쉽지 않다는 것을, 이렇게 지독히 알고 싶지는 않았다.

  권력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혹은 위해를 끼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화를 입기 시작했다. 비단 서역에서 온 줄을 잡은 자들 뿐만이 아니었다. 민간 신앙이 발달하고 온갖 민담과 전설이 새 뿌리를 내려 흔들리는 공동체가 다시금 둥지 튼 곳 또한 같은 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이끌지 않고 오히려 망측한 미신으로 홀려 놓았기 때문이다.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그녀는 작게 짓씹었다.

  소식통이 전해온 정보를 보고 길을 급히 꺾어 작은 마을로 가면, 이미 장승부터 시작해서 마을을 지키던 가장 큰 나무까지 전부 불에 타들어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나무도 사람도 집도 동물도 무엇 하나, 빠짐없이 전부 타들어가고 있었다. 매캐한 연기는 이미 봐 왔으나, 하늘로 제멋대로 흩날리는 별불도 이미 봐 왔으나, 그러나 쓰러진 채 익어가는 이들은 그녀에겐 그렇지 않았다. 흐윽, 그녀는 눈물과 함께 구토감을 억지로 참았다.

  더 빨랐다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빨랐다면 이 중 누군가는 살았을 지도 모른다.

 

  아, 틀렸다. 사제는 그녀가 살던 마을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해 본다. 그 때 저가 철 덩어리와 부러진 장대를 들고 한 명을 때려 눕히긴 했지만, 지금 수중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나. 아무것도 없다. 텅 빈 손아귀는 그저 시신을 수습할 수조차 없는 연약한 살코기이다. 불탄 시신에 데이는 것도 조금 두려운, 이제 막 세상에 나온 뜨내기 손.

살리려 하였으나 그럴 힘 없는 사람의 눈물이, 사제의 눈물이, 화마가 휩쓸고 간 자리에 떨어진다. 분함이 눅눅히 떨어진다. 검게 탄 땅과 온 생명의 흔적이 하늘로 불꽃 되어 날아가는 그곳에, 홀로 떨어진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던 자는 저와 그 소식통 뿐이었음을 깨달은 이의 눈물이, 검은 재 위에 발자국 남긴다.

 

  하여, 놋그릇 하나에 오늘은 잿물을 올린다. 달이 선명하게 비치는지 아닌지 그녀는 잘 모르겠다 생각했다. 떨어지는 눈물에 놋그릇 속 풍경이 끝없이 이지러졌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파랑이 일었으나, 파랑 만큼의 울음이 그녀의 속에서 멍멍히 울리고 있었다. 겨우 소리를 죽인 채 그녀는 기도를 올렸다.

당신이 만일, 나의 신이시라면. 나에게 무예를. 저들을 지킬 힘을, 주소서. 부디, 제발.

 

  잿물은 어디의 예우더냐.

  놋그릇이 엎어지며 쨍, 금속 우는 소리가 났다. 눈을 감고 기도하던 사제는 순간 선명하면서도 동시에 꿈결 같은 말에 눈을 홉뜰 뻔했다.

  감거라. 아니, 뜨고 싶으면 뜨되, 고개 들지 말거라. 그 말에 여전히 봄을 닮은 눈이 어슴푸레한 풍경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온통 재와 불씨 밭인 곳에, 타 죽은 자들의 유해 마저도 수습하여 사람 형상이라곤 그녀 밖에 존재할 수 없는 곳에.

  검은 옷자락과 길디긴 칼의 끝이 보였다. 칼의 끝이, 잿물을 담았던 심술궂은 놋그릇을 주욱 치워낸다. 저 검을 들려면 키가 팔 척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그녀의 키도 뭇 사람들에 비하자면 큰 편이라 의원님이 종종 쑥쑥 큰다며 웃으시긴 했다. 녹빛 눈을 굴리면 검날이 그릇을 스르륵, 재의 바닥에 굴려 대는 것이 보인다. 위로 눈을 치켜 떠도 검의 날이 끝도 없다는 걸 보자면…

 

  고개 들지 말라 하지 않았나. 불의 벌판 속에 존재하는 모든 불씨를 꺼뜨리는 냉혹이 내려앉는다. 쿵쿵 뛰는 심장이 죄인의 감정으로 가득 찬다. 어찌하여 고개를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아, 하긴 제 신께 잿물을 바치는 무당은 없다. 지은 죄 명명백백한가.

  땡그랑, 놋그릇이 마저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발걸음 소리 하나 없이 발이 오간다. 그 소식통 녀석이 살수 마냥 돌아다닐 때에도 저랬던가?

 

  작은 한숨소리가 들린다. 검이 천천히, 잿더미 위에 박힌다.

 

  “고개 들지 말라 함은, 비루먹을 내 모습을 뵈이기 싫어 그러니.”

 

  하니 생각 말라. 그러나 또한, 나를 눈에 담으려 하지 말라.

  덧대는 말이 차갑다 여기지는 않았다. 그녀는 일일이, 그러함을 설명하는 자신의 신에게 그리고 상상 이상의 예의 없는 푸대접에도 불구하고 벌하지 않는 자비에 감격하였다.

  그러나 그 잿물은 그녀 나름의 의견이고 물음이었다. 원망하고자 함은 아니었다. 다만 핑계라 한다면 다 타버린 마을의 남은 유해를 보아 넘기지 마십사 하였다. 그 결과로 그녀는 그녀의 신에게 모욕을 한 셈이기야 했다만, 굴할 수는 없었다.

 

  “저가 살던 마을에서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습니까.”

 

  간절히 말함에 대답이 오지 아니한다. 신이시어, 부디.

 

  “무얼 원하여 이리, 권역도 이름도 없는 신을 붙잡느냐.”

  “사람들을 지키고 싶습니다!”

 

  선명한 울분이다. 제를 지내는 향의 내음도, 모든 게 불탄 마을의 흔적도 전부 끌어안아 타오르기 시작한, 영혼에서부터 이어진 울음이다.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깨달은 자의 통한이었고 그러나,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필사적으로 찾으려는 몸부림이다.

 

  “신이시어, 저에게 예언을 내리신다면.”

 

  부디 제가 싸울 수 있는 힘을 가졌다 말씀해주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녀의 무신 武神 이 그녀를 본다. 자신의 유일한 사제를 본다. 하늘길을 열어 세상 만사 천리를 읽어야 할 아이가 어쩌다가, 망량만도 못한 괴괴한 저와 붉은 실이 얽히기라도 하였는가. 모든 강신이 이렇던가. 쇠를 닮은 메마른 자는 불꽃이 타는 땅에 선 채로, 그녀를 꿰어 본다. 인연이 엮인 실은 연기를 닮았다.

 

  “너가 해야 할 일은 장사를 지내는 것이고.”

 

  그리고 신은 그 실에 그어지지 않을 선을 긋는다.

 

  “나는 곧 끝맺을 자들을 알려 줄 뿐이다.”

 

  반려됨에 사제는 과연 굴할까. 그렇지 아니했다. 고개를 돌연 들어올려 보아도 신의 표정은 무감하기 짝이 없다. 신의 눈에 비친 사제는 불을 닮아 있었다. 불을 닮은 머리카락은 단정을 조금 잃었고 신록을 담은 눈은 명랑보다는 독이 바짝 오른 눈이었다. 어린 청년의 낯이지 아니한가. 씩씩 거리는 숨이 느껴진다.

 

  “어찌 저를 무력하게 두십니까!”

  “사제가 할 일이 본래 그러하며 무속에 몸 담은 자 할 일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저는 그 이전에 인간입니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해 주십시오!”

  “하여, 장을 지내라 하였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지, 죽은 자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남은 이들을 위한 것들. 아니 그러한가? 검은 무관의 복식을 한, 헤진 철갑옷 조각에 누덕진 형상인 신은, 벼려진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림자 없는 신이 그녀의 머리 위로 드리운다. 숨긴 오른팔이 날붙이마냥 번뜩이며 모습을 드러낸다.

 

  “…도와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신이시어, 제발.

  놋그릇서부터 이어진 잿물이 붉게 물든다. 이 마을에서 붉음이라고는 불과 피, 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 뿐이거늘, 물들일 안료는 그마저도 없는데. 피가 흘러 들어왔나, 무엇 때문에? 자신에게도 조금 튄 잿물이 온전히 핏방울로 변화함에 사제는 놀란다.

  신의 검에서 피가 샌다. 그건 생명을 지키는 이의 흔적이 아니라, 베어 넘긴 자의 흔적이다. 이 피는 업보의 흔적이다. 금방이라도 불 붙을 것처럼 뜨거운 피가, 달군 기름보다 뜨겁다 느껴지는 피가 그녀에게 방울져 있었다.

  놀라 숨을 들이키면 붉은 액체는 온데간데 없다.

 

  “난 지키는 이가 아니거늘.”

 

  무얼 부탁하느냐. 신이 이르되 너의 신은 너에게 곧 저주요, 할 수 있는 신 노릇이란 천기라도 가로채 일러주는 짓거리다. 무당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라, 마지막 남긴 말에 가시는 거냐며 고개를 퍼뜩 들면 놋그릇은 그대로 있으나 다만 맑은 물로 채워져 있었다.

  그 재는 내가 가져가마. 맑은 물이 가득 찬 중앙에 달이 떴다. 그 중간에 사제의 붉은 머리칼이 살랑거린다. 불꽃을 닮은 머리가 향 냄새를 풍긴다.

 

  후회 또한 가져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

 

  만일 당신이 저주였다면 저에게 왜 길을 이르셨습니까.

  그녀는 이제 언제나 슬픈 낯으로, 죽어간 이들을 위해 장사 지내고 제를 지낸다. 색동저고리를 입고 굴러다니던 방울 뭉치를 집어 슬퍼하는 영혼들을 위해 춤을 추고, 살 이유 중 하나가 토막 쳐진 사람들을 위해 유희한다.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 입 빌려 달라는 이들에게 조금 빌려줄라 치면 엄숙한 목재 조각 속에서 빛이 새어 나왔으나.

  허나 저 하늘에 계신 분이 말리셔도 이들은 그저 구원받고 싶을 뿐인 처지임을 어찌 합니까? 저는 경을 읽어 깨침을 주는 것보다, 아무래도 이 일이 성정에 맞는 듯합니다. 다른 표지는 섬길 수 있어도, 죽음에 지친 이들을 달래지 말라 하심에 저는 끝내 반기를 들겠나이다.

 

  행동으로 나서며 알게 된 것이 참 많았다. 그녀는 독실함이 가지는 한계를 눈 앞에서 보았으며 이미 늦은 것은 정작 아직 늦은 것도 아님을 알았다. 흙구덩이에서 사람 몇 명을 끝내 살리면서 든 생각이다. 경전 한 줄 외는 일은 사람에게 빛을 가져다 줄 수 있으나, 죽은 자의 미련을 세상에서 가시게 하는 방법은 입에 칼을 물고 방울소리를 내는 것이다.

  두 신을 섬기는 사제인 그녀는 그러나 해이하게 시절을 보낼 생각 하지는 않았다. 재를 닮은 분께서는 하늘길의 언어를 훔쳐 와 예언을 주시고, 엄숙하신 분께서는 활로를 빛으로 쬐어 주시는데 어찌 태평하게 있을까. 숨이 다할 때까지 뛰고 뛰어, 손을 뻗어야지.

  슬픈 낯의 사제는 여전히, 봄을 닮은 눈을 한 채로 겨울이라 할 시련들 속에 꼿꼿했다. 받은 것이 있다면 그만큼 베풀어야 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서라도 발버둥 치고 싶었다. 신께서 저에게 주신 기회가 다만 그 뿐이라면 그걸 활용해서라도!

발버둥이야 말로 살아있는 자의 숨결이요 표식 아니겠는가!

 

-

 

  아이에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제를 닮은 회한이 고개를 든다.

  아이의 고향이던 곳은 누구도 모르게 가장 먼저 화를 입은 곳이었으니, 이를 피하라 하였을 뿐인데. 욕심이라도 났는가, 이름을 내다 버린 전란의 흔적아.

  사제가 들고 있는 칼에 언뜻 비친 신이 스스로에게 물었다. 욕심이 났을까. 알아봐 주어서? 꼴에 신이 되었다고 섬기는 이 하나 생기는 게 기뻐서? 이제 와 우스운 생각이다. 신은 이내 눈을 감아, 다른 예언을 훔칠 준비나 마저 하기로 하였다.

  이어진 실이 여전함을 그는 모른 체 하였다.

 

-

 

  그녀의 신들은 정말이지 악독하기 짝이 없었다. 저를 섬기는 자의 손이 거칠어져도 상관없다는 듯이 그녀를 언제나 불과 피의 땅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그 꼴을 보고 또 보던 그녀는 결국 인내의 한계를 깨달았다. 슬픔을 가시게 하는 것은 죽은 이를 돌아오게 할 수 없음을 이미 아주 잘 알고 있지 않았나.

  결국 그녀는 끝내 스스로, 무를 배우기 위해 어거지로 손에 물집 잡히도록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였다. 간간이 찾아오는 소식통은 그녀를 볼 때마다 대련 상태라도 해 주겠다 하였고, 워낙 날랜 지라 그녀는 오늘도 패배를 쌓았다.

  손에 물집이 잡히고 부르튼다. 책과 기도를 위한 손은 이제 사람들을 죽음의 끝에서 구하기 위해 점점 뼈를 굵게 찌우고 살갗을 단단히 한다. 어설프게 영근다 한들 지금은 그 어설픔이라도 필요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악마 같은 신이, 저를 돌봐 주었다면 조금 더 처지가 나았을 텐데! 조금 서럽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그런 감상에 꽂힐 처지도 아니다. 신께서 보살피지 않고 신의 목소리 채 닿지 않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자신이 이리 투정 부릴 때가 아니었다. 온 땅이 피투성이 될 일이 코앞으로 다가온다.

 

  그녀는 엄숙한 목재 신상에서 피 흐르는 모습을 보고 만 것이다. 이 땅에서 아예 서역에서 온 자들의 뿌리를 없애겠노라 하는 표지를. 솟구치는 피에 그녀의 얼굴은 오랜만에 생기라곤 없이 질린 채였노라 회상했다.

  이거 가져가 쓰세요. 소식통이 가져다 준 단단하고 꽤 가벼운 곤봉은 소매 속에, 옷깃과 품 안에 숨기기 좋았다. 그리고 먼 곳을 볼 수 있는 천리경은, 그녀가 계시 받아 움직이는 사제라는 걸 티 내지 않기에 좋았다. 소식통은 의원 나리가 그녀를 매우 걱정한다는 사실을 알린 뒤, 의원 나리가 서남쪽 작은 항구에서 탈출을 돕고 있다 일렀다.

  그렇다면 그녀가 할 일은 필히 정해졌다. 사람들을 그리 보낸다. 탈출 시켜 청기와집 인간들의 생각이 바뀔 때까지 숨참는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앓아온 사랑이란 이름의 열병이 그녀의 심장을 또 한 번 달구고 있었다. 신은 끝내 이 열병을 내리누르지 못했다.

 

-

 

  이것을 난이라고 칭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머리 꼭대기에 사는 사람들이 멋대로 난이라 칭한 것일지도 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들고 일어나지는 않았다. 이 건은 꼭, 일어날 화를 예방하겠답시고 들쑤시는 것이지 않던가.

  화르륵, 관군이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말을 쓰는 이들을 죽인다. 같은 글씨를 읽으며 한때는 말을 섞었을 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뒤엉킨 운명의 터럭 끝을 계속 해서 알린다. 불타는 마을의 개수를 세라 치면 이제는 손가락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죽은 이들은 전리품이 되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혹은 둘 다였다. 가족의 시체를 건지지 못한 이들은, 글쎄. 집안 째로 죽어 나갔는데 과연 그 옆에 같이 눕혀 버리진 않고? 세력의 견제 치고 심하지 않나. 멀리서부터 천리경으로 마을의 상태를 확인한 사제가 중얼거린다.

  마을은 이미 소란이 시작되었다. 도망치는 자들 중 몇은 포기하는 게 옳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는, 사람들을 살리고 싶었다.

 

  숨이 뜨겁다. 당연하게도, 항구에 가까운 이 마을 또한 타들어가기 시작해서이다. 그녀는 이른 계시에 대략적인 감사의 제를 올리려다 그냥 빨리 출발하기로 하였고, 그 결과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이 대피중인 상황이었다.

  들이닥치는 관군에게, 붉은 머리의 그녀는 요주의 관심사였다. 분명 잡으려 하는데도 뒤를 쫓다 보면 새카만 연기가 어느새 눈 앞을 가린다는 소문이 자자하더니, 요즘 들어서는 기절까지 시킨다 하더라. 때문에 수탉의 피를 닮은 새붉은 머리칼의 등장은 순식간에 관군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 상황을 언제나, 늘 이용해 왔고. 가벼운 곤봉이 주변의 철제와 온 나무질의 것들을 두드렸다.

  나를 봐라. 저들 말고, 나를.

 

  관군이 그녀를 향해 창을 디민다. 우르르 몰려드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남은 마을을 짓밟아 무참히 부수기 위해 움직이는 무리는 또 갈려 움직이는 채다. 아니, 안 된다. 여기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 나가야 했고 살아남아야 했다. 그녀가 그렇게 정했고 그러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제법 빨라진 발놀림으로 그녀는, 사람들을 포박하고 찢기 위해 움직이는 이들 위로 확 떨어져 버린다. 그러니까 단단하고 큰 나무 문짝 따위를 어느 새 주워들고서!

  쿵! 깔린 이들이 제법 있다. 세 명 정도면 수확이 크다. 자, 이제 어쩔 테냐. 품 안에 든 반쪽자리 신의 흔적이 울어 대는 듯했다. 그리 재촉하실 거면 싸움법이라도 알려 주셨어야지요!

  터엉! 스스로 발 밑의 문을 부숴 방패 삼는다. 창이 불쑥 불쑥 튀어나온다 한들 막을 것이 있다면, 그리고 저항할 힘이 충분하다면 바보로 만들 수 있었다. 콱, 날붙이 박히는 소리가 족족 들린다. 그러나 부서지는 소리와 꿰뚫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만일, 너가 저 이들보다 더 날래다면. 그녀는 방패에 막혀 제 다른 사지를 망가뜨리려 하는 창대를 보았다. 더 날래다면 이라니, 그러기에는 무리였다. 일사불란하지 않은 불량 관군이라 한들 쪽수에서 그녀는 아득히 밀리고 있지 않았나.

  그러나 본래 그녀의 목표는 사람들이 도망칠 시간을 버는 일이었으니, 이쯤이면 충분하다. 그녀는 창대에 밀려나지도 공격받지도 않으며 주변을 어지럽히다가 다시 마을을 둘러싼, 이제 막 불타기 시작한 산기슭 언저리로 뛰쳐 사라지려 하였다.

  사위를 막는 연기가 조금 불길하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그래, 그녀의 생각보다도 이 곳을 소탕하기 위해 온 관군의 숫자가 훨씬 많았던 모양이다. 아무렴 그럴 만 했다, 이 마을은 탈출하려는 이들의 1차 집결지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많은 이들이 이 마을에 숨어들었고 숨 죽이며 때를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삶을 옮길 때를 말이다. 윗사람들은 이를 일망타진할 생각을 했을 터고!

  그러니 저는 여기서 저 인간들을 막아야만 했다. 혼자, 어쩌면 혼자 오롯이.

  쇠울림이 심장 박동을 따라 울린다.

 

  숨이 뜨겁다. 폐에 재가 쌓이는 성 싶다. 공포에 짓눌리면 안 되는데, 지금까지는 할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사람들이 도망치는 행렬을 보면 그녀는 안심이 되는 것이다. 아, 살아남아서 다행이라고.

  허면 엉성하게라도 저항을 해야지. 항구에 도달할 시간은 부족할 터다. 꾸욱, 그녀는 상처 가득 난 문짝 반 쪽과 곤봉을 든 채 자세를 바로 했다. 싸우겠다는 뜻이다.

 

  이미 주인이 달아난 집은 술래잡기하기 딱 좋았다. 특히 지붕을 타고 다니는 짓 말이다. 보통 그녀는 그런 식으로 유유히 사라지곤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의 바로 근처에 불화살이 떨어졌다.

  이건 안 된다. 직감이 그녀의 머릿속에 떨어진다. 아마 여긴 그녀의 무덤이 될 것이다. 불꽃을 닮은 머리카락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를 돌아 도망치는 패잔병처럼 격렬한 물결을 보이지 않는다. 그 자리에 그대로 선 채 모든 화살 받이를 각오한 듯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 저가 살리려 했던 수많은 신도들이 아른거린다. 차라리 죽음을 선택해 먼저 신을 뵙겠노라 선언하던 사람들. 그들도 이런 심경이었던가? 눈이 어지럽다, 머릿속이 어지럽다. 부디 이 불경한 자를 굽어 살피소서. 이 아둔하기 짝이 없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다만 다른 이들을 이런 식으로라도 구하는 일 외엔 없는 저를, 지켜봐주소서!

 

  후둑, 비가 내렸다. 소낙비가 내린다.

  피어난 불꽃 모든 것이 무용하기 시작하고.

 

  낙뢰가 내리쳐 어리석되 빛을 볼 줄 아는, 붉은 양을 지킬 지니.

 

  쩡! 굉음이 울렸다. 쇠붙이 투성이인 인간들이 삽시간에 하늘의 분노에 구워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그녀도 순간 놀라 자세를 흐트러뜨린 채다. 관군들 몇의 눈이 멀고 누군가는 분노에 그대로 숨이 거둬졌다. 고기 타는 냄새가 난다.

  불화살은 날아오지 않고, 눈 먼 이들은 코 앞에 있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있어서 살 길이 열린 셈이다. 붉은 머리가 봉화처럼 피어 올라, 쏟아지는 비 속에서 유일한 불처럼 흩날리기 시작했다.

  번개에 눈 먼 이들을 우선 문짝으로 밀쳐 낸다. 밀쳐낸 자들과 눈 멀지 않은 이들이 저들끼리 얽혀 쓰러진다. 올 때도 우르르 오던 이들이 쓰러질 때도 같은 모양새로 쓰러진다.

  우르릉, 낙뢰가 다시 땅을 훑기 위해 간을 보는 소리가 난다. 그 소리에 그녀를 공격하려는 관군들이 창을 집어 던진다. 그리 하면 사거리에서 우위를 점하는 자는 이제 그녀가 된다.

  빈 손과 손목에, 타격감 좋은 곤봉이 두들김을 위해 끼어든다. 퍽! 경쾌한 소리가 나며 한 사람의 손 하나를 침묵시킨다. 방패 역할 하는 문짝으로 밀고 들어가며 얼굴을 쳐 내고 머리를 또 다시 두드린다. 퍽! 꽤 좋은 빨랫감이다.

  얼떨떨해 하는 인간들 사이를 계속해서 헤집어 놓는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사람을 줄이고 시간을 끌어야 사람들은 무사히 배를 탈 수 있을 것이다. 비가 오는 만큼 출항이 늦어지면 더더욱!

 

  콱, 순간 그녀는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에 공격당했는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윽고 불타는 듯한 고통에 그녀는 주춤해야 했다. 순식간에 숨이 규칙을 잃어버린다.

  오른 팔뚝에 가시와도 같은 화살이 꽂혔다. 피가 새어 나가는지 팔뚝이 식었다가, 다시 뜨거워졌다가 난리통도 아니다. 히익, 숨을 들이켰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직, 버틸 수 있었다.

  아니, 버텨야만 했다. 화살 한 발이 더 꽂히는 순간이 온다 하더라도!

 

  쇄애액, 그건 이제 화살 한 발이 아니었다. 불을 붙이기 위해 날아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기 위해 날아드는 화살 떼가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눈 먼 화살 하나, 둘, 아니 몇 개, 그렇게 맞아도 인간은 죽는다. 인간은, 그녀는, 죽는다. 죽을 것이다. 죽음이 스쳐지나간다.

 

  향과 재가 섞인 듯한 냄새가 났다. 죽음의 냄새다.

  죽음의 냄새가 거센 바람과 함께 들이닥친다. 유독하기 짝이 없는 매연과 함께 들이닥친다. 타다 만 집들이 물을 먹어 검디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불티들이 별처럼 하늘에 천천히 수놓이고 있었다.

 

  아, 신이시어. 정녕 저 같은 자를 구하시나이까.

 

  재를 닮은 검의 낡음이 비에 씻겨 내려간다. 쇠는, 물이 참 잘 고이는 재질이라. 검에 흐르는 빗물은 차가웠으나 이윽고 더운 피로 변한다. 사람 하나를 검집 삼아 찔러 죽인 이는 연기 속으로 사라져 어느 순간 비명을 추수하고 있었다. 난이 일어난 가운데 그리 보기 힘든 수확제는 작물 대신 고기 투성이다.

  검은 연기서부터 드러나는 형체는, 죽은 자의 시체와, 그리고, 검은 연기와 재를 닮은 괴괴한 행색을 한, 연기 사이로 내뻗은 오른팔의 갑주가 유난히 선명한.

  그녀의 신. 무신. 반쪽짜리 검의 주인. 녹슬지 않는 검을 심장 삼은 이.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

 

  별불이 휘날리는 사이로 살아남은 이는 이제 그녀 뿐이다. 살아남은 다른 이들은 모두 항구로 갔으니 되었다. 숲에 숨은 활잡이들의 목숨은 그녀조차 알지 못한다. 다만 그녀의 신이 마지막으로 걸음한 곳에서, 때 놓친 효시가 하늘로 쏘아 올려졌다가 벼락에 부서진 것을 안다. 아마 그들도 좋은 꼴은 아닐 것이다.

  윽, 화살이 꽂힌 오른쪽 팔뚝이 여전히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신음을 흘리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으나 끝내 그러지를 못하였다.

  뽑으면 죽을까. 이 곳 말고도 공격당할 곳이 아직 있을 텐데, 흐린 눈으로 환상을 붙잡는다. 그 사람들에게로 가서 위험이라도 알려야 했다. 일어나야 했다. 흐르는 피 정도는 알아서 멎길 바라면서, 일어나야 했다.

 

  일어나야 하는데, 사람 몸이란 참으로 약하구나. 화살 하나에 이렇게 약해질 수 있구나. 처음 겪는 격통을 참지 못하고 무너질 수도, 있구나.

 

  그걸 모르는 너에게 이런 상황을 굳이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신은 끝내 쓰러진 아이를 본다. 새근거리는 숨결의 불안을 새기면서, 그녀의 작은 봇짐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본다. 신상에서부터 흐르는 기적을 다만 이런 표지로만 해석하는 아이라, 사랑으로 불타 눈 먼 듯 행동하는 아이를 어찌 할까.

  신은 아이에게, 신상에서부터 흐른 기적을 뿌렸다. 화살을 뽑으면 상처는 이미 나아 있다. 저 말고도 아이를 애정하는 신이 있어 다행이다. 아이는 쉽게 죽지 않을 터다. 그래, 이리 쏘다니지 말았으면 좋겠기도 하고 말이다.

  이런 고통을, 공포를 겪었으니 이제는 조용히 너가 사랑하고 또한 너를 사랑하는 이의 품으로 돌아갈 때다. 무거운 손이 아이의 눈가를 짚었다. 영혼에 어린 열병을 식힌다. 그 손길이 유난히 지극하다.

 

-

 

  차와 향이 한 데 모여 뒤섞여 타는 듯한 냄새가 났다.

  찻잎처럼 맑은 녹빛을 띠는 눈이 눈꺼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면 작은 초가의 풍경이 보인다. 타고 남은 마을의 가장 멀쩡하고 가장 구석진, 작은 집인 걸까. 비가 새지 않는 곳인지, 분명 정신을 잃기 전엔 옷이 물에 젖어 외면하려 해도 지치기 시작 했었는데. 지금은 모두 마른 채 한껏 보송한 마루가 눈 앞에 보였다. 마루에는 누군가 마시다 만 듯한 찻잔 하나만이 황량히 있었다.

  따뜻하게 데워진 듯한 바닥, 아니 이건 뜨겁지 않나? 익을 것처럼 뜨겁기도 한 듯 싶고,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자면 오른 팔뚝에 어떤 불편함 하나 느껴지지 않아 당혹스러워 했다. 더듬어 살피면, 꽂힌 화살도 그게 낸 상처도 고통도 모두 없었다. 붕대가 위에 붙어 있는 채도 하물며 아니었다.

  사제는 팔을 쭉 뻗어 불편한 곳이 더 있는지 살폈다. 몸이 가볍고, 당장 움직이기에는 공복감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걸음 할 만 했다.

 

  꿈에 흰 사자 의원님이 나왔다. 이제 그만 돌아오라 하심에 그리 갈까 생각하기도 하였다. 한 달음에 갈 수 있는 거리인가? 하면 그렇다 할 수 있으며, 보고 싶은가? 하면 또한 뵙고 싶었다. 그 얼굴을 죽기 전에 다시 한번 뵐 수 있다면 좋기야 하겠다.

  그러나 이 세상에 만연한 것이란, 끝을 목전에 둔 채 그 누구도 볼 수 없어지는 이들이었고, 죽음을 피하기 위해 찢어지고 흩어져 소식이 희미해진 이들이라. 저라고 다를 바 없음에 감사하였다.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그들을 살릴 이유 하나 더 덧붙여 줌에, 감사하였다.

  정신이 맑다. 의원님을 생각해서 그런지 눈시울이 조금 붉었다만, 물에 의해 탁함이 씻겨내려 가는지 정신이, 맑다. 맑아야 했다. 조금 부옇게 변한 눈 앞을 다시 소매로 닦았다.

 

  각오한 일이다.

 

  그녀는 조금 탄 내를 맡아, 혹여 누군가 불을 낸 채 도망친 것 아닌가 하며 부지깽이를 집어 들었다. 그러다가 소매에 있는 가벼운 곤봉도 덩달아 들어 쌍수에 쇳덩이를 든 채다. 준비 만반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습격자 한 명이라면야. 긴장한 손이 희게 질린다. 몸에 흐르던 피가 빳빳하게 몸을 굳혀 갔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탄 냄새는 주방에서 나고 있었다. 갓 식은 아궁이가 여전히 김을 내는 채였고, 아궁이 위의 무쇠 솥에서 밥 지은 내가 고소하게 났다. 허기가 졌다. 쓰라고 내놓은 듯한 정갈한 그릇과 주걱이 솥 옆에 놓여 있었다. 보고 지나치려 해도 끝내 배 안에서 아귀 울음 비슷한 꼬르륵거림이 들렸다.

  무쇠 뚜껑을 열면 그 안에는 밥이 들어 있었다. 주걱을 들어 뒤적거리면 맨 밑바닥에는 눌다 못해 조금 탄 밥이 있고, 맨 위의 쌀알은 설익은 듯 고슬고슬했다. 그녀는 가운데 층에 딱 적당히 익은 밥을 골라 내어 그릇에 퍼 담았다. 고봉처럼 꾹꾹 눌러 쌓고 나면, 누군가 도자기 두드리는 소리를 내었다.

  틱! 맑은 듯 둔탁한 듯한 소리에 고개를 돌리면 난리통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장독대가 눈에 들어온다. 거기에는 이 집 주인이 만들어 놓은 겨울 나기를 위한 찬거리들이 들어 있었다. 그럼 이를 알려준 건 누구인가? 풀쩍 담을 넘으면 거기에는.

  신의 유해가 있다. 손잡이와 칼날 반쪽이 남은, 그러고도 큼지막하게 느껴지는 검. 놓칠 세라 주워들은 그녀는 흙먼지를 털고 옷소매로 닦은 뒤 소중히 다시금, 봇짐 속에 모셔 놓았다.

 

  끼니를 챙기는 동안에 그녀는 울지 않았다.

  각오한 일이었다.

 

  신의 유해가 맥동한다.

  고작 꿈 하나로 그 애를 꺾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이 정도는 이미 작신하고 각오한 바다. 만약 꺾일 아이였다면 애초에 맨 처음부터 꺾였을 테다. 지금껏 버티고 선 면모가 차라리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아이의 속은, 짓무른 저와 달리 강직하고 강건하였다. 꺾이는 걸 바라는 신이라니, 이 무슨 망측하기 짝이 없는 신이며 소망 한 번 저주스러운지.

  그러나 또한 신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음을 어찌 하겠는가. 훔친 운명 속에서 바라본 광경은 너의 죽음이다. 신이 되어서, 유일하게 저를 모시는 영혼 하나 지키고자 함이 욕심이라 한다면 그래, 욕심쟁이라도 되어 주겠다.

  내 손에 무수한 죽음이 이루어지고, 그에 대한 속죄조차 끝나지 않았거늘. 내가 살릴 수 있는 아이조차 내 스스로 진창에 밀어 넣어야 한다면, 그게 신이라면 나는 차라리 악마라 불리겠다. 오랜 시간 해묵어 죄가 끝없이 늘어진, 무기와 전장의 노예와 다를 바 없는 무신을 맑은 눈으로 신이라 일컫는 아이를 내가.

  이것이 만일 형벌이라면 받들겠으니. 살릴 수 있다면 기꺼이 악마라도 되어 주겠고, 살릴 수 없음에 악마라고 스스로 나를 칭해 줄 테니, 저 아이를 사랑하는 서역의 신이여, 대답해 주시오.

 

  저 아이에게 기적을 한 번 더 일으켜 주오.

 

  쇠 우는 소리가 일정히 울렸다.

 

-

 

  꺾인다면 차라리 목숨과 같이 꺾일 아이는 끝내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보기에 관군이 향할 곳은 이제는 뻔했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벗어나 다른 땅으로 몸을 보신하기 위해 출항하는 이들이 모일 곳. 작은 항구로 사람들이 몰릴 것이라고.

  허기 지지 않은 배는 이제 다리를 움직여도 된다며 얌전했다. 꼬르륵 소리를 내지 않는 배는 밥통에 들어간 요기 거리를 소화시키기 바빴다. 그렇다면 그녀가 할 일은 간단했다.

  관군들이 집결지와 같았던 이 곳 마을에서 대패를 했다. 그러고서도 그녀는 이 마을에서 조금의 휴게 시간을 지낼 수 있었다. 관군이 포기하지는 않았겠지만 이 길목으로 쭉 항구까지 가서 좁은 길목을 막는다면, 될 것이다.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운이 좋다면 그녀도 살아남아 뒤를 따를 수 있겠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하는 짓거리 모두, 저가 믿는 신께 빌고 빌어 행운을 부디 점 쳐 주길 바라야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다만 저를 바라보는 엄숙한 목재 신상 속의 시선과, 반쪽짜리 검의 검은 무신에게 기도를 올릴 뿐이다. 현실적으로 도망부터 치지 않고 죽을 자리를 알아 찾으러 가는 이 돼먹지 못한 신도에게, 결례와 무례를 무릅쓰고 부디, 다른 이들을 구원할 일말의 축복을.

  저에게 빛을 보게 하시고 미래의 운명을 보이시게 하셨다면, 또한 제가 해야 마땅한 일을 하게끔 해 주십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제를 올리는 것뿐만이 아님을, 부디 생각해 주시옵소서.

 

  고개를 숙이로 자세를 내려 하늘에 말을 걸면 눈가를 내리누르는 감각이 느껴진다. 익숙한 감각이다. 그녀의 눈꺼풀을 가볍게, 차가운 손으로 누르는 존재는 그녀가 아는 한 단 한 존재 뿐이다. 신이시어.

 

  허하지 아니하겠다.

  청천벽력에 가까운 말에 그녀의 몸이 순간 일어나려 하듯 움찔거렸다.

 

  “어째서 입니까!”

  “이리 했어야 했다.”

 

  저 하등 의미 없이 사람 명줄만 소모 시키는 곳에 기꺼이 몸 던질 의향 있는 아이를, 이리 진즉 제지라도 했어야 했다. 어째서냐 묻는 아이가 있다, 그렇다면.

 

  “너는 그 난장판을 보고도 두려움 하나 없느냐.”

 

  인간이라면 필히 쌓여야만 하는 공포를 일러주겠다. 저긴 죽음 외에 무엇도 남지 않는다. 살아남은 이들의 대열에 합류할 생각부터 해야 하거늘, 죽음을 불사해가더라도 정녕 좁은 길목 하나를 홀로 틀어막을 생각을 하느냐.

  신이 묻는다. 금속처럼 찬 손이 사제의 열병에 데이는 듯하였다. 철을 닮은 이의 손이, 차가워야 할 손이 조금은 뜨거워졌다.

 

  “…허나 그 두려움에 매몰되는 다른 이들이 있습니다.”

 

  아이는 사랑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일까. 사제, 붉은 머리를 한 이 사제를 파묻어 버리기 위해 다가오는 공포를, 고작 다른 이들도 같은 공포를 느낀다는 이유로 이겨내겠다고. 심장 어드메가 달궈지는 듯한 느낌을 희미하게 받는다.

 

  “허면 너를 애정하던 다른 이들은 어찌 하고.”

 

  그런 희생은 결국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은 채로 망령만이 남는다. 겪은 바 있음에 신은, 유일한 신도를 말리고자 점점 거친 목소리를 낸다. 그 목소리가 먹먹하게 들릴 줄은 신은 모르고 아이는 알고 있다.

  아이는, 사제는 또한 알고 있다. 그 사람들이 저를 아낀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다. 자신 또한 돌아가서 흰 사자 의원님께 못 다한 효를 다 하고 싶었다. 싹퉁바가지인 그 소식통 녀석의 다친 곳도 챙겨 보고 싶었다. 받은 은덕이 있었던 만큼.

 

  “그러니 청컨대.”

 

  부디 제게 조금이라도, 이 오만방자한 어린 것에게 조금이라도 행운을 가져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 부탁은 그녀의 생사에서 그치지 않음을 아주 잘 안다.

  내포된 함의는 모든 피를 뒤집어쓰고 싶어 했다. 또한 그들의 얼굴을 마지막 순간에 볼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동시에 구석에 개켜 놓았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졌다. 숨어 있는 감정들이 소리 죽여 울어 제꼈다.

  아이는 스스로가 아직 영글지 않은 자임을 안다. 혼자로서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임을 안다. 그러나, 방대한 꿈과 담아 놓은 사랑과 동정은, 애정 어린 시선과 그걸 훑은 영혼의 깊이는 결국 그녀가 살아주었으면 좋겠다 생각할 정도라서. 그러니 대답이라 하면,

 

  “들어줄 수 없다.”

 

  너는 산 자의 줄에 서 이 땅을 떠나야만 하였다.

  전하는 목소리에 매정함을 실어 나른다.

 

  “감히 그 이유를 여쭈어도 괜찮겠나이까.”

 

  그러나 사제는 마땅하지 않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사제는 눈 안에 끊임없이 궁금증의 새싹을 틔우며, 혹은 열망과 책임감 그리고 깊디깊은 사랑을 피우며 끝내 신에게 이유를 묻는다.

  오래 되고 낡은 시절 일인 것을. 끄집어 내어도 아는 존재라곤 하나 없이, 이름조차 저 청기와집 자들이 지워낸 존재인 것을. 옥편에도 목간에도 귀한 종이에도 석비에도 하나 남지 않은, 그의 피와 먼지투성이 역사를 묻는 이는, 그 신이 살리고 싶은 사제라.

  사제는 고요와 침묵을 읽어내려 본다, 필사적으로.

 

  이미 죽어 마를 것도 없는 입이 달싹인다. 사제의 눈은 여전히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허나 열감은 신을 살아있는 인간처럼 끌어내리듯 그 온도를 더하고 있었다. 그건 수많은 인간의 한을 끌어안은 흔적이다. 동시에 죽은 자의 분노와 후회다.

 

  “너의 신이 사람일 적에 그리 죽었거늘, 그리 무리를 시키는 작태는 가당키나 하겠는가.”

 

  내가 그리 죽었는데 허락을 구하다니 우스운 일이다. 스스로 희생하여도 이리 회한이 감도는데 그걸, 살아서 할 일 많아 뵈는 아이에게 겪게 할 수 없다. 뱉어진 말은 하나하나 독기가 어린 단어의 나열이었다. 검은 연기보다 매캐하고 유독한 문장이었다.

 

  “…아,”

  “아니 된다. 이런 난은 모든 것을 구하려는 이상이 뭉개지기 좋은 곳이지.”

 

  이미 뭉개진 자가 말한다. 부러진 검만이 유일한 증거품이 되는, 존재가, 말한다.

 

  “신이시어, 당신은 어떤, 생애를 살았나이까.”

  “부질없는 전란이 있었다.”

 

  모든 것이 무용해지는 시기가 있었더랬다. 서역의 물건이 들어오기 이전 일이다. 많은 인간들이 죽고 수많은 백성들이 불안에 휩싸이기 전이며, 그 원인이 되는 일이었다. 거기에 그가 있었다.

  이름 없는 자들이 수두룩했고 거기에 그 또한 있었다.

 

  “너처럼 모든 것을 지켜보고자 하였고 그 결과란 이렇지.”

 

  땅에 메인 채로, 영육에 피를 묻힌 형을 달게도 받은 채로 그는 존재하고 있었다. 이견은 없었으나 다만 이후 세상에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는 것이 그리도 고역이 될 줄은 몰랐다. 그에게 내려진 형벌은 이게 아니었건만.

  노력이 물거품으로 화해 감을 보았다. 이로 말미암아 지금에 이르기까지, 무가치로 전락한 수많은 갈등과 핏방울들을 보았다. 그리고 전부 그가 묶인 땅 아래 흘러 기어이 그의 발자국을 피웅덩이로 만들고 만다. 한이 그에게 고여 갔다. 고결한 영혼이랍시고 저승사자에게 마저 거부당한 영혼은 모든 생과 사의 액막이 그릇 마냥 고여 갔다.

  이러한 일이 더 일어나야 하던가? 적어도 그의 고견으로는, 아니었다.

  앞서 걸어간 자가 다시 아이를 면면히 살핀다. 너는 더 살아야 마땅하다.

 

  “신으로 존재하시게 되었지 않습니까.”

  “헛소리. 죽은 영혼이 그저 땅에 매인 것과 다를 바 없음을 모르느냐. 한을 곱게 닦아 그저 칭호나 쥐여 준 허울에 불과한 처우임을.”

  “…허면.”

 

  신이 하고자 하는 말은. 사제에게 신이 전하고자 하는 말은.

 

  “부질없이 죽음을 향해 내달리지 말거라. 그것은 이미 네 신이 한 노릇으로 족하다.”

  “따라 가선 안 됩니까?”

 

  그러나 사제는, 길을 끝내 걸어서라도 눈 앞의 위험한 이들을 구하고 싶었다. 저의 안위보다 다른 이들의 위험이 우선인 지라. 영혼으로 남아 후회하게 되더라도 그리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손 아래에 어떤 눈을 하고 있을지 신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되어.”

 

  단호함이 끝내 선고되었다. 그러나 사제는 말 안의 온기를 느낀다. 눈 가린 손의 온기로부터, 그녀는 신이 전한 단 몇 문장의 옛날 일을 상상한다. 이건 비참함과 서글픔의 온도다. 사제는 그리 느꼈다.

 

  “신께선 그럼, 저들을 구원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리 할 여력 없다.”

  “그렇다면 젊은 제가 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사제는 끝내 포기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인간이 가능성의 가능성, 그 최후의 최후에 자기를 걸어보고 있었다. 자신의 젊음과 미래를 전부 내걸고.

  그리 내건다면, 그렇게 내걸고 싶다면.

 

  “못난 신도로다.”

 

  이제 신은 자신의 죽은 심장이 뛰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모순적이게도 이런 신격이란, 희생자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일해야 함에도 가장 부추기기 위해 존재할 때가 있다. 이럼에 그는 저를 끝내 망량이라 칭하고 싶었다. 이매망량, 도깨비, 신보다는 차라리 귀에 가까운 종류의 존재들. 미치광이 같은 자들.

  실소가 나오려 한다.

  불티가 휘날리기 시작함에 사제는, 공기의 열기를 느꼈다. 동시에 손이 거두어진다. 청동빛과 구릿빛으로 얼룩진 녹들을 몸소 씻어내기 위한 각오가 끝내 장작이 되어 신의 심장을 태우고 있었다. 달궈진 쇠가 끊임없이 재를 내뱉고 있었다.

철과 쇠를 닮은, 검과 갑옷을 닮은, 신의와 용맹을 담은 신의 날벼린 눈이 재를 내뱉고 있었다. 뺨에서부터 별불과 함께 흩날리고 있었다.

 

  “만류가 약하십니다.”

 

  사제는 씩씩하게 말한다. 거둬진 손길을 허락이라 여기면서. 손으로 가려 피했던 사제의 눈은 이슬을 머금고 햇볕을 머금은 한낮의 신록이다. 떠밀지 않아도 스스로를 제물 삼아 버리고 마는 자들의 눈이다.

  싹을 닮은 눈이라면 살아있을 때 꽃을 피워야지 어찌 저승으로 향하려 하는가. 신은 이를 악문다. 퇴색되었다 여긴 영혼 안의 비탄이 입 안에 똬리 튼다. 불지 않는 바람에 그의 밤과 쇠를 닮은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불티가 역천 한다.

 

  “구제받지 못한 영혼이 되고 싶으냐 스스로에게 물어보거라.”

 

  후회 한 점 없었다 이야기하던 시절은 이미 지나고 모든 것이 후회가 된 시절만이 남은 자가, 어린 영혼에게 말한다. 앞서 간 자가 뒤따라 와선 안 될 자에게.

 

  “이 앞은 이제 부조리한 참극 뿐이다.”

  “막겠습니다.”

 

  꽉 차고 단단한 음절이다. 공포에 짓눌린 기색 하나 없이.

 

  “죽음이 온다 하더라도?”

  “네.”

 

  그리고 바란 적도 없는 대답이 돌아온다. 고민이라도 해 주었으면 하였으나 소용도 없던 모양이다. 무신은 흙 속에 묻힌 제 시신 마냥, 굳고 굳어 바스라진 유해와 같아진 머릿속에 생각의 등유를 들이부어 본다. 행운, 그래, 아이가 빌었던 행운 하나. 그것을 끌어와 보자.

 

  ‘허면 너를 애정하던 다른 이들은 어찌 하고.’

  ‘그러니 청컨대.’

 

  너도 결국에는 돌아가고자 하지 않았나. 죽음을 각오한 만큼이나, 나는 그 말 속에 스몄던 두려움을 안다. 그러니 그 바람을 하늘에서부터 땅까지, 끌어와 보자.

 

  “그럼 몸을 숨기거라.”

  “예?”

  “무신으로서, 내 신당 뫼시는 것이 하고자 하는 게 있다는데.”

 

  하, 결국 그게 내 생전부터 하던 일인지라. 끝내 영혼에서부터 뇌명이 치고 만다. 저 아이를 살리고자 내가 업을 늘려야 한다면, 내 기필코.

 

  살려 보내리라, 사랑하는 이들의 품에.

 

-

 

  용오름이 땅에서부터 솟았다. 작은 항구에 들어차는 바다 수평선도 아닌, 흙과 재만이 무성한 길에서부터. 산등성이 너머서 이어지는, 집채도 아니고 궁궐 몇 개를 잡아 잡술 만치의 풍랑과 함께 땅에서 용이 오르고 있었다.

  시커먼 용이다. 마을 수십을 태우고 사람 수백을 죽인 대가를 치르라. 그리 말하는 양, 검은 연기에 품어진 한과 화는 숨조차 쉬는 걸 허락하지 않을 정도다. 용이 오른다, 용이 오른다. 항구에서 풍경을 보는 모든 인간들이 소리를 잊은 채 광경을 본다.

 

  우르릉, 천둥이 침묵을 깬다. 신의 천벌 있으라. 신벌이 있으라!

 

-

 

  사제는 정신을 차리면 자신이 항구라는 사실을 알아챈다. 모든 사람들이 작은 항구서부터 갓 도착한 배로 출발하고 있었다. 화를 피해서, 죽음을 피해 머나먼 땅으로 도피하는 발걸음이 소란을 넘어 북소리 만큼이나 컸다.

  불규칙적인 모든 발굴림이 귀를 울릴 만큼 커다랗다. 스스로의 심장 박동이 아무리 편두통을 일으키고 불안에 이리저리 날뛰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그만큼 도떼기시장이나 다름없는 곳에 그녀는 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제법 큰 키를 가졌기에, 장승 마냥 군다고 그녀는 방금 한 소리 들었다.

  분명히 그녀는 화가 지나간 자리에 서 있었는데 지금은, 마치 중심지에 온 것 같다. 업의 중심이고 깃창이 금방이라도 꽂힐 그런 곳. 효시가 금방이라도 날며 화살이 쏟아질 아슬한 곳. 그 곳에 그녀는 홀로 선 채다. 이전의 기억을 그녀는 더듬는다.

  그러니까 그녀는 방금 전까지 제 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생전 처음 보는 제 신의,

  옅은 웃음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신록을 담은 두 눈이 반복적으로 깜빡인다. 아, 이럴 때가 아니다. 그녀는 분명 할 일이 있었다. 제 신이 저를 항구에 데려다 놓았든, 어떠한 장난질을 악마처럼 하셨든 간에, 그녀가 항구에 서 있다면 그리고 관군이 이 사람들에게 창을 꽂으러 온다면.

  머리가 새하얗게 표백되기 전에 먹으로 생각의 글을 써 보자. 제 손가락의 피를 먹과 바꿔 써도 좋다. 입술일 짓씹고 혀를 물어뜯어 나는 핏방울 하나라도 좋다. 제가 할 일은,

 

  순간 거대한 열풍이 불었다. 숨 몇 개를 훔치고 싶어 안달 난 듯한, 매캐한 연기를 닮았다. 용오름이 이렇게 나던가? 콜록, 가벼운 기침과 함께 그녀는 바람에 떠밀려 인파 속으로 파묻혔다.

  사람을 무섭게 만드는 온도였다. 집과 마당과 마을이 모두 불타 사라지는 광경을 본 인간이라면 혼비백산하여 공간을 접어 달려나갈 정도로. 바람에서부터 자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화마가 걷잡을 수 없이 몰아쳐 오리라, 본능에서부터 느껴졌다.

  그런 와중에도 사제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여긴 이미 그녀가 상정한 좁은 길목이 아닌 그 너머다. 항구에서 할 일이라 한다면, 이미 도착한 배의 뱃머리를 보면서 그녀는,

  강인한 팔뚝은 쓸모 있는 법이다. 특히 누군가를 들어 올리거나 당길 때. 승선하는 자들로 파도치는 항구에서 그녀는 해야 하는 일을 찾았다. 그러나…

 

  성큼성큼, 점점 걸음걸이에 힘이 실린다. 해야 할 일 이전에 찾아야 할 사람이 있지는 않았나? 어떤 확신이 담긴 자의 걸음 보다는 다급한 이의 것을 더 닮은 걸음이 점점 달음박질로 변한다. 승선했나, 당신들은 빠져나갈 수 있는가? 나를 기다리느라 혹여 연기의 너머에서부터 숨을 쉬지 못한 채 서 있지 않은가?

  온통 사람들 투성이인 곳. 눈에 잘 띄는 사람이지, 의원님은. 흰 사자가 그리 흔한 형상은 아니니까. 그러니 되려 행색을 추레하게 하셨을 것이다. 끔뻑, 뻑뻑한 눈이 바닷바람과 재를 맞아 따가워 하고 있었다. 저가 못 찾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거라고.

  어리다. 각오하고 있었다. 어리다고,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거라고. 그러나 막상 자기를 찾는 이들이 있을 터고 자기가 찾는 이들이 있을 곳에서 누구도 찾아지지 않음에, 그녀의 눈 가득 들어찬 봄의 새싹은 순식간에 암녹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여름에 접어들듯이.

 

  마치 그 소식통처럼.

  따가움 탓을 하며 끝내 눈물 한 방울이 맺히기가 무섭게, 누군가 그녀의 팔을 확 잡아챘다. 무게중심을 탓하고 싶거든 멍 때린 자기 스스로를 탓하라는 듯 불친절한 당김에 사제는 눈을 홉떴다. 울컥하기 직전에 벌어진 일은 당혹이라는 감정 하에 눈물도 슬픔도 잠재우기 충분했다.

  정말로, 충분했다. 잡아당긴 손의 주인은 숲의 중심을 닮은 어두운 녹색 머리칼을 가진 자였으니까. 그 뒤에 보이는 사람은, 숲의 틈바구니에서 하늘을 보면 보일 뭉게구름의 흰 빛을 가진 의원님이다. 막연하게 그리워했던 사람들이고, 그 얼굴들이고, 살아있는 모습이고 형체다.

  아, 다행이다. 아직 어린 영혼이 만약이라는 가정을 끝도 없이 할 일은 없어졌다. 안도라는 감정이 이렇게 부드럽고 평화롭던가. 당장에라도 울고 싶어지는 감상이 들게 하였던가. 생존함에 다행인지, 혹은 죽어서 시체라도 남김에 다행인지를 구분하기 어렵게 하는 세상이다. 그 속에 홀로 남아 점차 메말라가던 영혼이 한순간에 풍족해지는 순간이다. 그녀는 제를 지내기 위해 죽음을 목도해야만 하는 이였으므로.

  그러나 오늘은, 그렇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의 신이 목전까지 바래다준 재회다. 그녀는 불어닥치는 열기의 주인을 알았다. 철을 닮은 무정히도 다정한 신. 기억을 헤아려 보면 얼마나 섬세한 지 눈치챌 수 있는 사람이다. 그의 손길을 잊을 정도로 숨 막히는 열풍이지만.

  땅에서부터 올라온 매캐한 검은 용은 그녀가 막고자 했던 길목을 전부 틀어막은 채였다. 항구로 향하는 연기들은 풍랑에 비해 너무나도 적었다. 땅에 묶인 귀신처럼. 그녀의 신처럼. 그러므로 배는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고, 자신은 저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그리고 보호하고자 하는 이들과 함께 이 땅을 뜨면 되었다.

 

  허나 이제 제 뿌리가 살아있음을 느낀 될성부른 떡잎은 꺾이고 싶지를 않아 해서.

 

  신께서 주신 자비임을 알고 이것이 행운임을 알고, 제 오만을 사죄하며 숨 붙음에 감사하니. 그러나 다만 이들을 평안케 하고자 움직임에 다시금 옹송그리고자 하니.

  정신을 차린 새붉은 머리의 사제는, 그 머릿결이 불꽃보다 붉게 흩날리도록 제 일행들을 이끌었다. 손길에서 흰 사자 의원과 암녹색 소식통은 알아챘을 것이다. 우리가 배에 당도하는 순간 저 사람은 손을 뿌리칠 것이라고.

  속절없이 끌려감도 잠시, 크게 소리치는 소란한 광경 속에서 소식통은 기어이 목청을 드높인다.

 

  “갈 거에요?!”

  “갈 거다.”

  “어디로?!”

 

  설마 저 불 구덩이인지 시체 구덩이인지도 모를 곳은 아니죠? 소식통의 눈이 빠르게 눈짓해 방향을 가리킨다. 흰 사자 의원은 의견에 잠깐의 숙고를 거치는 듯 침잠한 표정을 한 채다.

 

  “걱정하지 마라, 이 근처에 있을 테니까.”

 

  동시에 몇몇 군관들이 길목의 틈새 사이에서, 연기를 비집고 나오기 시작한다. 상처를 입은 자들이 대다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개중에는 사람 한 명이라도 더 잡아 죽이기 위해 창을 꿰어든 자도 있었고, 배의 출항을 늦추기 위해 어떻게든 화약통을 끌고 온 자도 있었다.

  저게 안 터진 게 용하군, 의원이 중얼거렸다. 사제는 침을 삼키며 마음 속으로 동의했다. 철로 빚은 화포가 연기 속에 달궈져 당장에라도 뱃머리를, 돛대를, 용골을 부수고 싶어했다.

 

  우르릉, 한 번 더 천둥이 울었다. 사제의 눈에 순간 광명이 비춘다.

 

  “신이시여!”

 

  그녀는 그대로 소식통이 내어 준 봉을 내던진다. 방향은 화포가 있는 쪽.

  사람들이 거의 배로 몰려, 곱게 다져진 잔디와 흙먼지만이 존재하는 배경에, 화포라는 철덩어리를 향해서, 검은 원을 가열차게 그리면서.

 

  쩡! 벼락이 쳤다. 화포를 향한 신벌이 내리쳤다 화포쟁이들이 그대로 쓰러진다. 봉을 줍기에는 이마저도 새카맣게 타버렸으니, 소식통에게는 미안할 일이다. 그녀는 사람들이 모두 배를 무리 없이 탈 수 있게끔 이 곳을 지키기로 하였다.

  벼락이 치기 전의 번쩍임이 그녀에게 다음 표지를 이른다. 금속 표면도 아닌 것들이, 비쳐서는 안 될 것들이 비친다, 예컨대 그래, 물도 먹지 않아 빛에 반사될 것 하나 없는 너덜한 대문 조각 말이다. 그녀는 그걸 접어듦과 동시에 창잡이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콱!

  박히는 칼날에 맥아리 하나 없다. 이 정도면 할 만 했다. 두어 개의 창날이 더 박혀 부수려 들어도 그녀는 외려 차분을 유지했다. 모든 창날이 박히는 순간에 그녀는 문짝 조각을, 몸을 비틀어 내던지듯 했다.

  그녀는 문짝을 던지는 체 하며 여즉 잡은 채이나, 창 꼬나 쥔 것들은 한순간에 몸이 휘청거린다. 훅, 잡아당겨 지는지 내밀려 지는지 혼란스러운 찰나, 그래, 바로 지금!

  두터운 문짝을 방패 삼아 그녀는 관군 장정 셋을 밀쳐냈다. 여러 길목에서부터 새는 관군들이 아직까지는 많지 않았고, 그에 비해 배에 탑승하는 자들은 점점 많아졌다. 좋다, 이 정도면 괜찮다.

  쇄액!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사제의 어깨 살점을 날름 먹어 치운 투사체 소리다. 그러나 방향은 그녀가 위험을 느끼던 쪽이 아니다. 배에서부터 날아온 화살이다. 누가? 하고 틈 내어 돌아보면 그 곳에는 천리경을 목에 건 채 활시위를 당긴 소식통이-그녀는 저리 무기를 들면 살수라 표현하고 싶었다만- 있었다.

  암녹색 소식통이, 혹은 사람 죽이는 일 하던 살수가 화살을 시위에 다시 꿰었다. 어디로 움직일 것이냐고, 신중한 자세가 그녀에게 묻는 듯도 하였다.

 

  천둥과 함께 다음 표지가 그녀의 눈에 비쳤다. 부러진 창대다.

  몸을 구름과 동시에 그녀가 누르고 있었던 관군들에게 화살 하나가 꽂혔다. 여긴 그에게 맡겨도 괜찮을 성싶다. 창대를 주우면 그 창대를 걸쳐 놓던 부서진 거치대도 보인다. 조금 굵고 커진 손으로 들 수 있는가? 가능했다. 허면 들어야 했다. 판때기만이 보호막을 형성할 수 있는 형식적인 곳이 아니다, 이 곳은.

  부러진 창대는 아직 날카로운 창 끝이 달려 있었다. 아주 날캄히, 빛나는…

  …화포 한 대가 더 오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제게 축복을!”

 

  외치며 던졌다. 작은 쇳덩이는 화포 구멍에 정통으로 쑤셔 박히며 화포쟁이들을 약올렸고, 그 사이에,

  쾅! 신벌이 다시금 울렸다. 아니, 이번에는 저 안에 채워져 있던 화약이 날붙이에 자극되어 인재를 당한 것일 지도 모르겠다. 허나 그런들 어떠한가? 배에 화포는 아직 맞지 않았다. 배를 이루는 모든 요소가 무사했다. 사람들 마저도!

  행운이었다. 그녀가 바란 행운이 땅에서부터 범람하고 하늘에서부터 내리치고 있었다.

  연기에 막혀 눈 먼 관군의 화살들은 용오름에 휘말려 승천했다 도로 제 명을 재촉하는 비가 되기 일쑤였다. 쇄액! 그에 비해 바닷바람을 타고 흐르는 살수의 화살은 그녀를 보조하며, 배에 접근하려는 치들의 걸음을 쏠쏠히 틀어막았다.

  사람들이 모두 오를 때까지, 그녀는 조금 더 시간을 벌 수 있겠다. 사제는 집기 하나를 더 손에 쥐어 든 채 방어를 개시한다.

 

  “신이시여!”

 

  당신의 어린 양에게 축복을. 그에 화답하듯 하늘에서 다시금, 천둥이 울었다.

 

-

 

  연기 너머에서 붉은 머리칼을 한 아이의 기척이 느껴졌다. 의원 되는 이와, 발 빠르고 진즉 손에 피 묻힌 살수의 기척도. 둘은 조금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승선에 성공한 모양이지. 그러나 아이는 아직 땅에 뿌리 박힌 채다.

  사악, 길게 뻗은 검에 또다시 한 사람이, 둘 넷 여섯이, 힘 없이 채이고 썰려 죽었다. 오늘은 업을 쌓는 날이다. 영혼에 담을 한과 화를 풀어내고 그만큼 또다시 쌓아 제 죄를 공고히 하는 날이 될 것이다.

  각오는 했는가, 하늘인지 지하인지의 왕이 태양빛을 말 삼아 묻는다. 쬐는 빛이 그다지 편하지는 않으나 날카롭지만도 않다. 각오, 각오라. 그딴 것은 이리 되었을 적부터 진즉 하였고 저 아이를 살려 보내야 겠노라 영혼에 스스로 성토함에 다시금 새겼노라고.

  외치듯이 검을 빼 들었다. 당장에라도 피 하나 더 볼 수 있을 법한 검은 날 벼린 채 햇빛을 쪼개고 있었다. 하늘이여, 그러니 너는 벼락이나 마저 내리시길. 햇빛은 이윽고 먹구름에 다시 모습을 감춘다.

 

  뼈와 살을 꿰뚫는 손속이 점점 잔인해 진다. 재를 닮고 쇠를 닮은 그의 머리칼 반트막이, 눈 한 쪽이, 매캐한 연기 속에 덮여 가고 불에 덮여 간다. 하얀 재의 눈에 뒤덮여간다.

  아니, 정신을 차려야 했다. 아무리 저 스스로를 망량이라 칭한들 여기서 업을 뒤집어쓴 채 뒤바뀔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직 아이는 대피하지 못 했잖은가. 이런 난에서 얻어야 하는 업은 저가 다 덮어쓸 터이니.

  살아라, 살아서 머나먼 땅으로 도망쳐. 너를 돌볼 신은 아직 남은 채이다. 내가 무너져도 하늘이 너를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죽은 자들의 한이, 화가 신의 심장 내면에서 우글우글 들끓기 시작한다. 쇳덩이를 닮은 몸이 이제는 숨 하나 하나에서 불 거스러미를 내뱉는다. 한 서림에 속 쓰리다. 구해져야 할 것들은 모두 구해져야 마땅한 데도, 방해를. 신은 신경질적으로 죽었어야 할 피를 뱉는다. 유독한 피다.

 

-

 

  어두컴컴한 숲에 들어찬 연기는 온전한 그의 권역이다. 전란의 흔적을 모조리 들고 와 다른 살아있는 것들에게 화풀이를 하며 한을 덜어내거나, 혹은 한을 더 키우거나.

  아마 죄를 덜고 싶었다면, 온전히 영혼으로서 깨끗해지고자 속죄를 잇고 싶었다면 아이 옆을 지키며 행렬을 쫓아야 했다. 정말 마땅히 무신으로 정착하고 싶다면 그리 해야 했다. 그러나 이리 선택하는 이유는 속죄 마저도 달갑지 않기 때문이라.

  허무한 결과를 지켜봐 온 바, 네 선택의 가치는 결국 무엇이었는가 끊임없이 외쳐 오는, 제가 죽이거나 혹은 제가 살렸음에도 단명한 자들의 울음소리. 너의 희생은 결국 부조리했고 너가 죽인 피들은 부조리한 끝을 맞이했구나 소리치는 하늘과 땅의 손가락질. 모든 것이 어우러져 점점 그를 갉아먹고 있었다.

  다 집어 치우라지. 지금 이 한 순간을 다시, 태우고자 하는데. 아무리 나를 흔든다 한들 내 희생에 저 아이 하나 살 수 있다면 나는 그걸로 족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나를 그러지 못하게 만들어.

 

  아, 세상은 언제나 그렇듯이 비협조적이었지. 얼굴을 숨겨야 할 적에 도깨비를 닮은 탈을 썼던 무신 武臣 이 중얼거렸다. 얼굴이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죽음이 오십 리는 가까이 붙으며 백 보는 붙어 와 지척으로 다가오기에.

  탈이 얼굴에 들러붙는 거 같아 웃음만이 샌다. 이미 죽은 것이 얼굴 가릴 이유 무엇이 있는가? 하늘, 너는 나를 그렇다면 악마라 칭하고 싶어 이러는가? 실소 수준이 아닌 비웃음이 계속 해서 연기 속에 울린다.

 

  연기가 순간 가심에, 가면이 채 씌워 지기 전의 왼 눈이 반응한다. 배의 출항을 알리기 위한 북소리가 들린다. 심장소리처럼. 쿵, 쿵, 죽은 사람의 정신마저, 피에 짓눌린 영혼마저 잠에서 깨우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산 자의 소리를 함부로 엿들은 죄랍시고, 신은 기어코 한 명의 활잡이를 놓치고 만다. 아무렇게나 주워섬긴 효시가 쏘아졌다.

  피가 가득 눌어붙은 검이 그의 손에 있었다. 그 검을 닮은 눈이 충혈된 채로, 순간을 직시한다. 목격한다. 연기 너머의 골속과 심흉을 본다.

 

  배의 마지막 승선객은 붉은 머리의 사제였고, 화살이 쏘아 짐과 동시에 낙뢰가 쳤다.

  광대한 빛무리와 이어진 어둠, 끝을 채 모르는 채 아이의 이별을 마주한 신이 이제 유일하게 숲에 남았다. 아이를 너는 살렸나? 너의 업보로 아이가 죽은 것은 아닌가? 좋지 못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뭣 하나 확신할 수 없는 매캐함만이 남았다. 채 꺼지지 못한 불꽃만이 남았다.

  할 일을 잃어버린 존재 하나만이 남았다. 무저갱 속의 허망만이, 남았다.

 

  저항하기에 이제는, 눈꺼풀도 검도 너무 무겁다.

  …혹은 가볍나? 아, 가볍다. 아주 가볍다. 아주 가벼울 것이다.

 

  작두를 타듯이, 날아갈 듯이, 가벼울 것이다…

 

-

 

  쇠로 이루어진 신에게 낙뢰가 이어 쳤다. 아니, 이제 그 존재를 더 이상 신이라 부를 수 있는가? 그건 귀다. 악귀다. 마귀이고 악마이다. 그러나 또한 사제의 기억 속에서는 영원히 신으로 남겠지. 유일한 신도가 살아있는 한, 영혼이 이어지는 한 그 존재는, 신일 것이다. 아마도.

  귀신.

  무신은 피를 뒤집어 쓴 제 모습을 보면서 떠나는 배를 일별했다. 녹슬지 않은 반쪽짜리 검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 갔다. 영혼이 담긴 그의 유해가 수몰되어 가니, 땅에 발 디딜 수 있는 마지막 시간 동안은 적어도, 그래!

 

  망량의 한을 풀리라! 그림자와 피웅덩이를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 되도록.

모든 증명이 바다의 물거품이 되었다면, 영원히 속죄할 수 없는 죄를 새겨 가장 추악한 죄인이 되리라!

 

  그리하야 모든 희생의 업을 나에게로 몰리게 하리라!

 

-

 

  배가 떠날 적에 마지막으로 밧줄을 잡아 채었다. 지친 팔이 부들거리고 그럼에도 꾸역꾸역 배에 올라탄 사제는, 선박에 올라탈 적에 몸을 뛰쳐 올랐더랬다. 본능이 시키는 대로. 코 앞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저가 배에 올라탈 수 있게 마지막까지 돕던 이들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선택이 맞았음을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영겁과도 같은 찰나라고 생각했다. 팔뚝 혹은 등 어드메에 구멍이 나겠지. 그녀는 공중에 뜬 채 상처를 기다렸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벼락이 살벌하게도 내리쳐 화살을 부숴버렸기 때문이다.

바다 표면에 내리친 낙뢰는 그대로 화살을 집어삼킨 채 심해 속으로 빛을 가져가 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살아남았다. 단지 지친 몸을 이끌고 있을 뿐이었다.

  벼락에 스친 그녀의 봇짐이 가장 무구한 금속을, 반쪽짜리 검을 훔쳐간 줄도 모른 채 말이다.

 

  신의 흔적이 바다에 침잠한다. 영원히 녹슬지 않을 금속이, 소금물에 뒤덮인다. 세상 모든 눈물을 담은 곳에 깊이 빨려 들어 간다. 숨 하나 없는 곳으로, 모든 피가 씻겨 내려갈 끝으로.

 

  아이가 탄 배에 순풍이 분다. 어깨를 도닥여 등 떠밀 듯, 가거라.

 

-

 

  시간이 익어갔다.

  세월이 흘렀다기 보다는 갑자가 두 바퀴는 더 돌았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그동안 계절은 수백 번 넘게 바뀌었고 사람의 세대 또한 일고여덟 교체되었다.

  목간이 서책으로 변하였고 서책은 빳빳한 양장 종이로 변하였으며, 이제는 빛으로만 표현되는 것으로 바뀌어도 갔다. 그럼에도 이름을 남기지 못한 이들은 영원히 땅 밑에 파묻힌 채다. 목간 사이 밧줄 하나에 간신히 제 이름을 새긴 자도, 비석 하나 못 남긴 자도. 모두 미래에 당도하지 못한 채 과거에 남은 채다.

  세상이 바뀜에 녹슬어 가더라. 인연이란 으레 그러하다. 실이 연기처럼 화한다.

 

-

 

  드문드문 눈을 뜨면 바닷바람이 동굴을 울린다. 차가운 물이 들어오고, 웅덩이 속에 무엇 하나 고이는 것 없이 내려간다. 혼탁을 허락하지 않는 순전한 응달이다.

  무엇이 그의 세월을 낡게 했더라. 지은 죄? 끌고 온 업? 이름이 잊힌 신은 졸려 오는 눈꺼풀을 느리게 깜박거렸다. 피는 씻겨지지 않은 채, 해안 동굴 가득 그의 그림자 속에 채워져 있다. 눈을 금방이라도 번들거릴 것만 같은 한들이다.

  적어도 저들은 씻겨 내려갔으면 좋을 텐데. 제 몫은 아니나 제 탓에 땅에 묶인 혼백들이, 썰물 빠져나간 자리에 대신 고여 있었다. 이름 잊힌 신은 잊혀 감에 따라 점점 그 한들도 화도 모두 스러질 것이다. 고여 있는 저 이들 만이라도 저승에 고이 돌아갔으면 좋을 텐데.

  너희에게 수의라도 입혀 주지를 못하고…

 

  깜빡. 녹슬어 가는 것도 잊어버린 자가 회한에 잠긴 수마에 들어간다. 다시 나오고, 또 들어간다. 반복되는 계절만큼 잠들고 슬퍼하는 영혼의 무게만큼 일어나고, 다시, 잠든다. 깜빡, 다시 잠에 든다.

 

  폭풍우 없던 바다에 별안간 벼락이 내리쳤다.

  그 소리에, 동시에 신은 눈을 떴다. 벼랑 끝에서부터 의식이 건져 올려진다. 어느 곳에도 가질 못 하고 바다에 깊이 가라앉지도 못한, 반쪽짜리 검이 쇠울음을 냈다.

  쇠는 물이 잘 맺히는 성질이 있다. 차디찬 동굴 안에서 맺힐 물이 바닷물 외에 더 있겠는가마는, 슬지 않은 쇳덩이의 벼린 날에 고인 물방울이, 이 동굴에 몸을 맡긴 이래 처음으로 소란하다. 먹구름을 닮은 검이 후드득, 동굴에 소나기 따위를 뿌리고 싶어 했다.

 

  인기척이 들린다. 바위 투성이 해변을 조심히 걷는, 서투른 아이와 같은 인기척이다.

  신이 잃어버렸던 인기척이다.

 

-

 

  한여름 태양을 닮았다 할 수 있는 붉은 머리카락이 짧게 흔들렸다. 여름임에도 언제나 봄을 닮은 눈동자가 유별나게 빛나는 청년이 있었다.

  바닷바람이 파도 만큼이나 거친 것인지, 그 반대인지는 몰라도, 말소리 하나는 시원하게 먹어 치운 뒤 도망친다. 먹구름과 뭉게구름이 뒤섞인 하늘 만큼이나 바다는 물과 포말로 엉망진창이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 친 걸 마을 어르신들이 구경하시겠다 한다. 여러 미신과 토속 신앙과, 하여튼 그런 계통의 자료를 조사하기 위해 개강하기도 전에 산과 바다가 맞닿은 곳에 들렀는데, 며칠 묵을 집을 찾기도 전에 소란부터 일었다.

  우릉, 비가 금방이라도 올 기세라 도시 아가씨는 피해 있으라 하시지만, 이런 곳에서 물러난 적 없음이라!

  성호경을 그으며 조심히 내려간 해변은 돌무더기 투성이었다. 자갈이라 부르는 것이 애교라 할 정도로, 해변을 이루는 하나 하나가 모가 나고 뾰족한 돌들이다. 즉슨 걷기에 어렵다는 소리이고 발목 삐기에 쉽다는 소리다. 잘그락, 발을 디디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발 뻗는 소리보다 먼저 난다.

  외려 좋은 것도 같다. 물에 젖은 매끄러운 돌들은 물귀신의 손 마냥 축축하고 미끄럽기 짝이 없었으니까. 물론 발목 접질려 입수하는 불상사도 충분히 생길 수 있어 도긴개긴이긴 하였다. 마을 어르신들도 벼락 친 곳 길은 익숙하지 않으신지 굽은 등을 연신 피시며 먼 곳을 바라보고 계신다.

 

  제가 가 보겠습니다, 해변까지 내려온 젊은 피가 맥동한다. 그에 따라 하늘이 술렁거린다.

 

  아무도 걸음 한 적 없는 곳이라, 길이 썰물에 자주 침수되거든. 덧붙이시는 말에는 분명한 염려가 담겨 있었다. 감사하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미소를 지으면 마주 웃으시는 눈 속에 어쩔 줄 모르는 감정이 담겨 있다.

잠깐 살피고 오면 된다. 그냥 벼락일 터다.

 

  낙뢰였어야 했을 빛은 거꾸로 먼 곳에서부터 치솟고 있었다.

  그러니까, 낙뢰였어야 했는데? 눈에 가득 담긴 빛이 그녀를 부른다. 이리 오라는 듯이.

 

  잘그락, 잘그락. 억센 돌들의 파도를 헤치고 천천히 발을 옮긴다. 튼튼하다 여겼던 발목도 길 내지 못한 곳에서는 조금씩 통증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마을 어르신들이 소리치는 것들은 파도와 바람이 모두 잡아먹었다.

  그 어떤 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다만 바람이 빛으로 이끄니. 그녀는 물에 젖은 야트막한 자갈길에 다리와 발을 얹는다. 걸음을 얹어 감에, 철썩이는 파도는 의외로 길을 침범하지 않는다. 분명 보였던 파도는 높았는데도. 휘모는 바람은 여전히 귀를, 여름 한낮의 귀 끝을 차게 식힐 기세인데도.

  길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양 구는 것이다.

 

  그렇게 길의 끝에 도착하면.

  바람이 내몰려 갇히는 곳이 있다. 깊이를 채 모르겠다 싶은 동굴이 있다. 밀물이 고였다 빠져나가는 곳인지 풍화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곳에서, 이지러질 듯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저벅, 저벅.

  그 안에서 새붉은 머리를 한 아이는 녹슬지 못한 신을, 본다.

  이름이 잊힌 신이 시간에 익어 새 생애를 사는, 사제를 본다.

  파묻혔던 시간이 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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