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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관의 기록 - 파란

 

  오늘은 식년 무과(武科)에서 장원을 차지한 날입니다. 어머님과 아버님이 기뻐하며 팥을 쑤어 마을에 떡을 돌렸습니다. 좋은 날을 기념한다 하신다더군요.

  그럼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몇 해 전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아마 평생 잊을 수 없겠지만 혹 내가 죽고 난 후. 아주 먼 훗날 같은 날을 경험할 이를 위해 글을 남기고자 합니다.

 

* * *

 

  태어난 지 일곱 해가 되던 겨울이었습니다. 모든 겨울이 힘들지만, 그 해의 겨울은 유독 설움이 가득한 계절이었습니다. 가을에 곡식을 수확하지 못 해 식량이 부족하던 데다가, 마을에 이상한 일이 자꾸 일어났습니다.

  우물이 핏빛으로 물들기도 하고,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윽고 사람들도 목숨을 잃기 시작했지요.

  겨우내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내가 알고 지내던 사람들만 해도 벌써 다섯이 다시는 건너올 수 없는 강 너머로 사라졌습니다.

  움막에 살던 거지 아저씨는 지난 달 밤을 넘기지 못하고 얼어 죽었습니다. 과부 아주머니네는 겨울이 중간쯤 지났을 때 이유 없이 급사했습니다.

  어저께는 돌아오지 않는 아저씨를 찾아 늦은 밤길을 나선 꽃분이네 오라버니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아저씨는 낭떠러지 아래에서 발견됐습니다.

  어린 내가 기억에 남지 못했을 뿐, 이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 해 숨을 거둔 자가 절반,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진 이가 또 반이었습니다.

  숱한 슬픔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뿐이었습니다. 부르튼 손을 그러모아 신께 기도하는 것. 간절히 되뇌면 목소리를 전해들은 신께서 소원을 들어 준다 배웠습니다.

  나는 떠나간 이들이 내세에 행복하길 소망했습니다. 그들 모두 저에게는 소중한 존재였으니까요.

  거지 아저씨는 저에게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그릇된 존재들을 조심하라 말해주었지요.

  과부 아주머니네는 살갗이 벗겨져 피가 흐르는 무릎을 닦아주었습니다.

  꽃분이네는 부모님이 늦게 돌아올 때면 따스한 호박빛 등잔불 아래에서 쉬어가도록 해주었지요.

  그들의 선의가 나를 추운 북풍 속에서 살아가게 해주었습니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얼음처럼 변해가도 내 마음은 언제나 따뜻했습니다. 머리칼에 꺼지지 않는 불씨가 타오르고, 눈동자에 지지 않는 초록이 머무는 이유는 그래서일지 모릅니다.

  나는 ‘나’를 만들어준 이곳에 봄이 찾아들길 바랐습니다.

  우리 마을은 사람들만큼이나 아름다운 곳이었으니까요.

  얼음이 모두 녹으면 개천을 따라 맑은 물이 흘렀고 바람에 하늘거리는 들풀은 신을 벗어도 살을 베지 않았습니다. 꽃들은 손톱에 물들어 열흘 밤이 지나도 함께 해주었습니다.

  아이들과 저잣거리 쏘다닐 때면,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나 아저씨들이 주전부리를 들려주었습니다.

  여섯 살을 먹은 해까지만 해도 그리했었는데……. 이제는 모두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거리에는 수북이 쌓인 눈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상행을 따라 나서야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마저 밖을 나가지 않고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혹여나 내가 잘못될까 봐요. 마찬가지로 저 또한 가족들이 잘못될까 무서웠습니다.

  부모님의 눈을 피해 하루도 빠짐없이 서낭 나무에 갔습니다. 맑은 물 대신 꽁꽁 언 개울물을 부숴다 얹어, 다 헤진 소매가 넝마가 될 때까지 손을 비비고 입술이 부르터 피가 나도록 소원을 빌었습니다. 언젠가 떠나간 어른들이 하였던 모습을 떠올리면서요.

 

  “신이시여…. 더 이상 아무도 죽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간절함이 부족했던 걸까요. 아니면 어른들이 하던 것과 다르게 어설퍼서였을까요. 춘삼월이 다가도록 겨울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을에는 여전히 눈이 내렸습니다. 이상하게 여겨 몇몇 어른들이 인근 고을에 도움을 청하러 갔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까닭 모르게 죽어가고 있었지요.

 

  “쯧쯧쯧…. 마을에 마(魔)가 꼈어….”

  “그게 무엇인가요?”

  “우리 마을에 안 좋은 일이 계속 찾아드는 이유이가 무엇이겠냐. 삿된 존재가 찾아온 게 틀림없다.”

  “…그게 없어지면 괜찮아질까요?”

  “아마 그럴게다…. 내일은 굿을 해야겠구나.”

 

  주먹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동네에서 오래 산 할아버지였습니다. 틀릴 리가 없었지요.

  그 마(魔)라는 것을 없애면 되는 거였습니다. 그러면 꽃분이네에도, 우리 집에도 다시 호박빛 불빛이 번져가고 마을에는 다시 봄이 오겠지요.

  그 길로 짐을 챙겨 마을에서 나왔습니다. 거지아저씨가 준 서책, 과부 아주머니가 준 복숭 나뭇가지, 아주 옛적에 꽃분이네에서 받은 –귀한 물건이라고 들어 꽃분이와 꽃분이네 오라버니와 함께 슬쩍한- 하얀 가루를 보자기에 들고 왔습니다.

  마(魔)라는 것이 복숭아 나뭇가지와 요 짠맛이 나는 하얀 가루에 약하다고, 서책에 적혀있었습니다.

  한 낮에는 굽이굽이 굽은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해가 저물어 갈 즈음에는 빽빽한 나무들을 가로질러 숲으로 향했습니다. 하늘에 걸린 달을 길잡이 삼아 골짜기 안으로 들어갔지요.

  어린 나이였지만 깊숙이 들어갈수록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횃불대신 길을 밝혀주었던 달빛이 어느 틈엔가 사라져있었습니다. 쉴 새 없이 지저귀던 새들의 울음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당연하게 존재하던 것들이 사라지고 눈앞에는 처음 보는 검은 안개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본능이 속삭였습니다. 저것이 사람들을 잡아먹은 마(魔)라고.

  재빨리 나뭇가지와 가루를 꺼내 손에 쥐었습니다.

 

  “사악한 마(魔)야!! 내가 왔다!!! 모습을 드러내라!!!”

 

  그러자 안개 속에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습니다. 누군가 몸 안에서 큰 북을 끊임없이 두드려댔습니다.

  이윽고 안개 속에서 무언가 튀어나왔습니다. 그건 제가 아주 잘 아는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꽃분이네 오라버니…?”

 

  사라진 친구네 오라버니가 소름끼치는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웃고 있었습니다. 눈구멍이 온통 검고 쭉 찢어진 입가에서는 검은 피가 꿀럭꿀럭 쏟아졌습니다.

 

  “저, 저리가…!”

 

  황급히 흰 가루를 뿌렸습니다. 복숭아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흔들기도 하였지요.

  그러나 그것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킬킬 웃으며 천천히 다가왔습니다. 도망치려했으나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크아-!

  그것의 희게 질린 손가락이 목을 틀어쥐려 할 때, ‘그’가 나타났습니다.

 

  “… 이곳에서 무엇을 하는 거지.”

 

  한 쪽 머리를 새카맣게 물들이고 또 다른 머리는 잿빛을 녹여낸 남자였습니다. 온통 검은 옷을 둘러 입은 남자는 붕대를 둘둘 감은 손에 검을 들고 꽃분이네 오라버니의 거죽을 뒤집어쓴 마(魔)를 꿰뚫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제까지 아무렇지도 않아하던 마(魔)가 괴로워하며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방해된다.”

  “네? 아, 네…!!!”

 

  남자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검을 고쳐 쥐고 마(魔)에게 덤벼들었습니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하늘을 향해 검을 치켜 올리고, 횡으로 그어냈습니다.

  마(魔)는 정말이지 싱거울 정도로 손쉽게 사라졌습니다. 그것이 사라지자 자취를 감췄던 달빛과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다시 들려왔습니다. 뺨을 할퀴던 차디찬 겨울바람도 다정한 솔바람으로 변해있었습니다.

  남자는 멍하니 서있는 나를 보다니 미련 없이 걸음을 돌렸습니다.

 

  “자, 잠시만요…!”

  “마(魔)는 없어졌다.”

 

  다급한 목소리도 남자를 붙잡지 못했습니다. 남자의 시선이 부르튼 볼에 머무른다 싶더니 이내 먼 곳을 향했습니다.

 

  “…돌아가.”

 

  뒷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어쩐지 삼켜진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나는 홀린 듯 걸음을 옮겨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부모님이 마을 입구까지 달려 나와 나를 품에 안았습니다.

 

  “저, 저기 좀 봐…! 목련잎이야…!”

 

  나는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누군가의 음성을 따라 고개를 돌렸습니다.

  아…. 봄이 오고 있었습니다.

 

* * *

 

  내가 무과에 지원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때 보았던 남자처럼 강해지고 싶었습니다. 그의 발자취를 쫓아가다 보면, 언젠가 그 사람처럼 겨울을 몰아내고 봄을 가져다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어쩌면…….

 

  본인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가 찾아온다면 다시 먹을 갈아 붓을 들고 글을 남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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