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제 - 익명
휘영청 밝은 달이 뜬 산길을 바삐 지나는 봇짐 장수는 턱까지 들이찬 숨을 내쉬며 이마의 땀을 훔쳐낸다.
"이 쯤 오면 늘상 보이던 지장보살이 영 뵈질 않는군."
슬금슬금 발목께를 잡아채는 불안을 떨치려는 양 좌우로 둘러보던 뒤로 괴이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이보게나."
벌레 소리마저 잦아들어 나뭇가지가 부대끼는 소리가 스산하게 울리며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눈동자가 두려움에 질끈 감긴다. 힘이 풀릴듯한 다리를 억지로 쥐어짜내 달음박질하니 뒤에서 다시 부르는 소리가 따라온다.
"이보게나-."
타닥, 땅을 딛는 경쾌한 소리가 뒤이어 이어진다.
아뿔싸!
이미 지친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나동그라질 찰나 뒷덜미를 잡아채는 힘에 구르는 것은 면하나 이제 목소리는 바로 뒤에서 들린다.
"이보게나, 자네."
겁을 잔뜩 집어먹은 봇짐 장수가 돌아가지 않는 목을 간신히 돌려 실눈으로 바라본 곳에는 하얀 형체가.
"아이고, 저는 집에 떡두꺼비같은 아이가 있습니다요. 제가 예서 죽으면 그-,"
"커흠."
"아이가- 음?"
헛기침 소리에 읍소하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보니 하얀 장삼을 입고 백발을 곱게 틀어내린 노인과 제 뒷덜미를 잡아 멈춰 세워준 홍안의 청년의 녹보석같은 눈을 볼 수 있었다.
"사람이었나..."
기력이 탁 풀려 그대로 주저앉으니 청년이 부축하며 걱정스레 본다.
"그리 놀랄 줄 몰랐네. 괜찮으신가?"
그건 저를 불렀던 노인도 마찬가지라 봇짐 장수는 식은땀이 물러나자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유, 이 밤중에 누가 부를거라 예상치 못해 그렇습니다. 저 같이 급한 마음에 넘는 사람이 아니면 아닌 밤중에 고개를 넘겠습니까."
그는 흙먼지가 묻은 바지를 털어내고는 너털하게 웃으며 봇짐을 당겨 매었다.
"헌데 어인 일로..."
"고개 너머 청리골에 가려하네. 시급하다는 연락을 받은지라 마음이 급하여 길을 서두르다보니 길을 헤메게되질 않았나. 달이 떠올라 걱정이던 차에 지나가는 과객을 보니 반가운 마음이 앞선게지. 다시 사과함세."
"청리골이라 하면 제가 가려던 마을이군요. 적적한 김에 길동무가 생기니 든든합니다. 그러니 괘념치 마시죠. 이이가 담이 작아 과히 놀란 탓이니."
"그리하겠네. 그런데 담도 작은 사람이 왜 한 밤중에 고개를 넘고있었나?"
사내는 부끄러운 듯 볼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사실 청리골은 제 고향입니다. 다섯해 전에 장사하러 길을 떠나 이제야 제 발로 돌아가는 길이죠. 간간히 소식을 주고받았으나 이제사 돌아갈 면이 생겨 아이의 생일날에 맞추려고 서두르다보니 이리 되었습니다."
그리 말하며 품 안의 비단보를 단단히 동여매는 것을 보았다. 듣자하니 아이의 생일에 선물할 물건이라 달음박질 하던 와중에도 고이 품어 소중히 갈무리하는 것이 선하였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곱게 땋아내린 다홍색의 머리카락은 앞으로 내려져있고 그와 대비되는 푸른 철릭을 단정히 차려입은 갓 어린 티를 벗어난 듯 보이는 청년이 밝게 웃었다.
"도사님의 호위를 자처하여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초출입니다."
"어린 무사님 이셨군요."
허리춤에 찬 환도를 본 봇짐 장수의 표정이 한결 안도감에 싸였다.
"안 그래도 요새 호환이 많다하여 걱정이었는데 두 분이 함께 한다면 걱정할 것이 없겠습니다. 오히려 제가 신세를 부탁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완연히 기세를 회복한 봇짐 장수를 따라 서둘러 발길을 옮기는 그림자들 뒤로 새 울음소리가 간간히 울렸다.
동이 트기 전에 마을에 도착하였으나 아직 어둠이 물러가지 않은 시간이라 불하나 켜지지 않은 사위는 어둑하기만 하다.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이라 좁다 하지만 내어줄 방 한 칸 있을거라 호언하는 봇짐 장수를 따라 도착한 집은 무색하게도 사람 그림자 없는 폐가였다.
황망한 표정으로 집안에 뛰어든 사내는 신도 채 벗지 못하고 문지방을 넘어 안방, 곁방, 부엌을 넘나들며 제 가족을 찾았으나 터럭 하나 보이지 않자 문간에 주저앉아 넋을 놓는다.
"어찌 이럴수가, 어찌..."
구슬피 흐느끼는 소리가 통곡으로 바뀌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참담한 심정을 토로하는 곡성이 기이해지기 까지도.
"내가 어찌, 어찌... 기다렸는데......"
흐느낌에 귀기가 어리고 덥수룩한 수염의 얼굴이 피눈물로 덮이며 기이한 각도로 꺽이는 고개는 호환을 당한 창귀의 상이라.
[고대했거늘...]
성대에서 나오는 공기의 울림이 아닌 귀의 의념이 타고 흐른다. 품안에서 피에 젖어 삭은 비단보가 떨어진다. 잔뜩 헤어진 천 사이로 작은 당혜의 앞코가 설핏 보인다.
백의 도사가 뒤로 물러나고 청의 무사가 앞선다. 그에 반응하듯 창귀가 튀어나와 창백한 이를 드러낸다. 허리춤에서 매끄러이 끌러나온 환도에 창귀가 막히고 그대로 힘을 주어 떨쳐내자 뒤이어 도사가 주술의 방점을 찍는다.
"급급여율령!"
푸른 사슬이 널부러진 창귀를 감싸며 그 움직임을 봉쇄하자 몸부림친다. 허나 자신의 힘으로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자 희게 울부짖는다.
애달피 소리높혀 울음일지 비명일지 모를 것을 내지르니 반응하여 찾아오는 것은 창귀의 주인이라 산의 주인이라, 인육에 맛을 들여 살겁을 일으킨 주범이어라.
굶주린 범이 내려온다.
육중한 몸으로도 바람같은 몸놀림을 보이며 도사에게로 짓혀들어오는 범의 앞을 무사가 팔로 막아섰다.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피와 같이 붉었으나 금구의 등껍질로 만든 완갑을 위에 덧입은 푸른 옷자락만이 범의 잇사이에 찢겨 들어갔다. 환도를 고쳐잡고는 능히 10척은 너끈히 넘을 범을 노려보았다.
"허어, 대체 몇을 잡아먹었는고."
도사가 혀를 차고는 품에서 부적 몇 장을 꺼내든다. 장삼의 긴 소매가 허공에 펄럭이고 범의 주위를 떠돌며 각기 어둠속에서 기회를 엿보던 창귀들에게 흩날린다.
"창귀는 맡을 터이니 범을 부탁드립니다."
"예."
단단한 음성의 대답과 함께 무사에게 쥐여진 환도 사이로 흰 빛이 아롱지기 시작한다.
"천지신명께 아뢰오니."
검신을 따라 올라 검끝에 이르기까지 기묘한 흐름을 그리며 어둠을 밝혔다. 흉흉한 살기와 광기로 점철된 범의 눈이 가늘게 뜨여지고 묵직하게 밀려드는 압박감에 지지 않으려 부릅뜨었다.
"천리를 거역하고 순리를 흐뜨러트리는 저 악귀들에게."
마치 웃음짓듯이 말려 올라가는 범의 입꼬리를 목격한 순간 땅을 접듯이 달려드는 범의 아가리가 목전이었다. 팽배히 부푼 근육들이 한 순간을 노리고 힘을 터뜨리며 패인 흙바닥을 뒤로하고 뛰어오른 범이 휘두른 앞발을 환도를 들어 막았으나 그 충격이 어간한게 아니라 족히 수 장은 뒤로 날아갔다. 낡은 장지문을 뚫고 사라진 무사의 방향으로 범이 한걸음 다가섰을 적에 너머에서 상서로운 흰 빛이 흘러나왔다. 나뭇바닥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검을 올곧이 세운 무사가 범에게 쏘아져가고 심상찮음을 감지하였는지 날래게 몸을 피한다.
"천벌을!"
어둠이라는 화선지에 빛을 갈아 만든 먹이 곧고 길게 그려졌다.
콰직.
몸을 피한 범에 맞춰 발에 힘을 싣자 디딘 흙바닥에서 작은 파열음이 들리고 강제로 허리를 틀어 방향을 바꾼다. 다가오는 검날에 범의 눈이 뜨이고 동시에 채찍처럼 휘둘러진 꼬리에 복부를 얻어맞고는 다시 뒤편으로 날려졌다.
[크허어엉-!]
가죽을 믿고는 반격하였던 범이 몸을 기울이며 고통스러워한다. 어깨가 피로 물들어가자 고통과 혈향에 흉성이 짙어진 범의 눈이 핏줄이 터진 양 새빨갛게 물든다. 터벅, 앞발을 짚으며 입새로 귀기가 흐르는 모습이 그야말로 살귀가 따로 없었다.
이번에도 금세 일어난 무사의 옷은 이리저리 찢어져 안에 받쳐입은 갑옷이 군데군데 드러났으며 머리는 간신히 묶여있를 뿐 산발이 된 지 오래였다.
창귀를 붙잡고 하나 하나 염하던 도사에게 범의 고개가 돌아가자 다급히 자세를 잡은 무사가 그대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노린 마냥 무사의 환도를 물어 이 사이에 낀 범은 그대로 부러뜨리려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에 따라 흔들리는 몸뚱이에 혀를 차며 손을 놓고 물러선 무사를 비웃듯이 검을 내뱉어 발아래 두고는 내려보았다.
"...검은 아직 예례용으로 써야겠습니다."
씁쓸하게 읖조린 무사가 늘어진 철릭 아래에서 편곤을 꺼내들었다. 손잡이를 잡고 어깨를 풀고는 해사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무사에 흉성이 뇌수에 치민 와중에도 소름이 돋아 이를 드러내는 범에게 완연히 빛에 쉽싸이 편곤이 날아들었다.
어딘가 어설펐던 환도와 달리 편곤은 어린 무사의 손처럼 매섭고 날카롭게 범을 향해 짓혀들었다. 발톱이 부러지고 뼈가 부러진 범은 염을 마친 도사의 주박에 묶인 채 두개골로 편곤을 받아낼 수 밖에 없었다.
-
"이걸 어찌합니까..."
"곧 운반꾼이 올 겁니다. 범의 가죽을 벗기고 해체하는 전문 업자가 있으니 그들에게 맡기고 저희는 마을로 돌아가죠."
도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어린 무사는 봇짐 장수가 남긴 유류품을 조심스럽게 다시 싸고는 품에 챙겼다. 그 외에도 창귀들이 남긴 물건들 중에 멀쩡한 물건이 있으면 묻은 피를 닦아내고 털어 하나하나 고이 챙겼다. 두 사람이 다시 고개를 넘어 이웃 마을에 도착하자 마을 입구에서부터 기다리던 어린 아이가 뛰어나왔다.
달포 전, 호환을 당한 사람이 나오자 마을 사람들은 각자 이웃 마을에 혹은 친지의 곁으로 떠났다. 봇짐 장수의 아내 역시 홀로 딸아이를 데리고 이웃에 위치한 마을에 위탁하였으나 이를 모르던 봇짐 장수가 고개를 넘다가 변을 당하였다 한다. 이를 전해들은 아내는 혼절하여 오늘 내일 하게되자 어린 딸이 관청에 찾아가 읍소하여 이르기에 조정에서 갑사를 보내었다 한다.
어린 무사는 비단보에 싸여있던 고왔을 당혜를 껴안고 우는 아이를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 외에도 호환을 당한 이와 가까왔던 이들이 각자의 이름을, 그도 못해 그저 울음을 내보이며 슬퍼하였다.
"괜찮으십니까요."
사체를 해체하고 운반하는 역으로 따라온 청년이 옆에 풀썩 앉으며 말을 건다. 품을 뒤적여 나온 주머니에서 유지에 싸인 당과 하나를 건네는 폼이 어줍잖게 위로하려는 모양이었다.
하늘은 그저 맑았고 당과는 참으로 달았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