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단이 이야기 - Pianhwa

 

 

  (해당 글은 서정오 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신화'에 기재된 '옥황선녀 오늘이'와 '오구신 바리데기'를 기반으로 재구성하여 작성된 패러디입니다.)

 

  아득히 먼 옛날, 인간 땅 어느 너른 들에 한 여자아이가 살았어. 이 아이는 들판 한복판에 움집을 짓고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외롭게 살았는데, 이 아이가 누구며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르는 거야. 그러니 사람들은 들판을 지나다가 아이를 보면 꼭 한 마디씩 물어봐.

 

  “너는 어디서 왔니?”

  “처음부터 여기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제까지 어떻게 살았니?”

  “배고프면 큰 새가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추우면 동물들이 다가와 꼭 안아주어 무탈하게 지냈습니다.”

  “성은 뭐고, 이름은 또 무어냐?”

  “성도, 이름도 모릅니다.”

  “그러면 나이는 몇이더냐?”

  “나이도 모릅니다.”

 

  이렇게 대답해서 사람들은 성도,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아이에게 이름이라도 지어주자고 머리를 맞대봤지만, 특별히 떠오르는 이름이 없는 거야. 그러다 아이의 머리카락 색이 붉은 걸 보고 누군가 ‘단(丹)’이라는 이름이 좋겠다고 했어. 그렇게 아이의 이름은 단이 되었어.

 

 

 

  단이는 주로 들에서 나는 열매를 먹고, 동물들과 뛰놀며 생활했어. 가끔은 지나다니는 어른들의 말동무가 되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근처 산에 오를 땐 심마니들에게 약초 캐는 법을 배우면서 말이지. 때론 제가 사는 들까지 놀러 나온 어린아이들에게 노래를 부르고, 재미난 놀이를 하기도 했지.

  마을에 함께 살지는 않았지만, 단이는 사람들에게 무척 소중한 존재가 되었지. 물론 단이에게도 이제까지 오가며 사랑을 베풀어준 사람들 모두가 소중하게 되었지.

  그러던 어느 날, 세상에 큰 혼란이 찾아왔어. 동물들이 사납게 변하고, 정체 모를 역병이 돌고, 작물들이 자꾸만 죽어 나가. 무시무시한 일들이 자꾸만 벌어지는 거야. 단이가 사는 들판 근처의 마을들도 계속해서 안 좋은 일들이 벌어졌지.

  결국 단이는 아프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를 찾으러 길을 떠나기로 해. 빨간 머리카락을 바짝 틀어 올려 묶고, 가볍고 튼튼한 옷과 신발을 챙겨 입고, 여벌의 옷과 신까지 봇짐을 만들어서 등에 짊어지자 길을 떠날 채비가 끝났어.

  처음에는 많은 사람이 단이를 말리려고 했지만 단이가 길 떠날 채비를 단단히 하는 것을 보면서 그저 단이가 무사히 다녀오기만을 바라기 시작했어.

 

 

 

  그렇게 들판을 떠난 단이는 서쪽으로 계속 걷기 시작했어. 언젠가 사람들로부터 산과 들짐승들의 왕이 서쪽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거든. 고개도 넘고 개울도 건너고 가시밭길도 헤쳐가며 계속해서 서쪽을 향해 걸어갔지.

  짐승들의 왕이 살고 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기라도 한 것처럼 서쪽에는 한껏 사나워진 짐승들이 계속해서 튀어나왔어. 단이는 사납게 달려드는 짐승들 때문에 겁이 났지만, 아프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이까짓 짐승들을 무서워할 때가 아니었지.

  몇 날 며칠을 가다 보니 머리가 눈처럼 하얀 어르신이 넝쿨에 주렁주렁 열린 조롱박을 따고 계셔. 그런데 조롱박 넝쿨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끝이 안 보여.

 

  “조롱박 따는 어르신, 서쪽에 사는 왕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이 조롱박으로 바가지를 만들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구백구십구 개 만들면 가르쳐 주지.”

 

  단이는 곧장 봇짐을 내려놓고 조롱박을 따기 시작했어. 잘 영근 조롱박들을 반으로 갈라 끓는 물에 삶고 안과 밖을 박박 긁어내서 햇빛 잘 드는 곳에 차곡차곡 말리고 쪼그라든 건 치우고 온전히 마른 건 쌓아두고,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아흐레 밤 아흐레 낮이 지나자 잘 만들어진 바가지가 완성됐어. 마지막 바가지까지 다 만들고 나니까 어르신이 서쪽에 사는 왕은 왜 찾냐고 물어.

 

  “저는 저 너머 이름 없는 들에서 나고 자란 단이라고 합니다. 요즘 들어 짐승들이 자꾸만 민가를 습격하여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어 그 연유를 여쭙고자 가는 길입니다.”

  “그거라면 간단하네. 사냥꾼들이 자꾸만 어린 것들을 잡아가는 통에 화가 난 게지. 제 새끼가 귀한 줄 알면 남의 새끼도 귀한 줄 알아야 하는데 말이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하게 웃고 있던 어르신의 분위기가 한겨울의 눈보라처럼 싸늘해졌어. 아무래도 이 어르신이 서쪽의 왕이었던 모양이야. 단이는 서슬 퍼렇게 닿는 눈길에 저도 모르게 고개가 움츠러들었어.

 

  “보아하니 세상이 흉흉한 연유를 찾으러 온 게로구나. 썩 내키지는 않지만, 맡긴 일을 잘해주었으니 가야 할 길은 알려주마.”

 

  그리고는 조그만 바가지 하나를 단이에게 쥐여줘. 너무 작아서 고작해야 물 서너 모금 담길까 말까 한 그런 바가지야. 어르신은 단이가 고민할 시간도 주지 않고 어느 길을 가리키면서,

 

  “이 길을 따라 아홉 고개를 넘으면 물레로 실을 잣는 이가 있을 터이니 거기 가서 남쪽의 왕을 만나러 가는 길을 물어보거라.”

 

  하고는 다시 조롱박 넝쿨 사이로 사라져. 허둥지둥 손에 들린 조그만 바가지를 봇짐에 쏙 집어넣은 단이는 조롱박 넝쿨을 향해 꾸벅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다시 길 위에 올랐어.

 

 

 

  단이가 길 따라 아홉 고개를 넘어가는데 이번에는 온갖 새들이 다 몰려와서 단이의 발길을 방해하네. 길 떠나기 전에 자신과 제일 많이 놀아주고 제일 많이 보살펴 주던 새들이 생각난 단이는 무시무시한 새들의 방해가 너무 서러웠어. 그렇지만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발을 멈출 수 없었지.

  그렇게 아홉 고개를 넘어가니 과연 커다란 물레와 베틀이 놓여 있고, 물레 앞에 앉아 실을 잣는 이가 있네. 드르륵 드르륵 물레는 신나게 돌아가고, 실패도 빙빙 돌면서 실은 만들어지는데 베틀은 텅 빈 채로 그 앞에 쌓여 있는 실뭉치만 산더미만 해.

 

  “실 잣는 도련님, 남쪽에 사는 왕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이 실로 천을 짜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구백구십구 필 만들면 가르쳐 주지.”

 

  단이는 실패를 챙겨서 베틀에 앉았어.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야. 실패에 감겨 있는 실이 보통의 실이 아닌 모양이야. 뜨끈뜨끈한 열기가 손끝에 전해졌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물레를 바라보니 물레에 걸려 있는 게 글쎄, 활활 타오르는 커다란 불꽃이지 뭐야. 하지만 불꽃으로 실을 잣고 천을 짜는 게 뭐 대수인가.

  단이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베틀에 날실을 걸고 북에는 씨실을 걸어 한 올 한 올 천을 짜기 시작했어. 실패의 실들은 제각기 온도가 다 달라서 직접 손으로 만져가며 골라 걸어야 했어. 날실과 씨실의 온도가 너무 차이 나면 짜던 천이 까맣게 타버렸지. 그렇게 잠시도 쉬지 않고 아흐레 밤 아흐레 낮이 걸려서야 마침내 구백구십구 필의 천이 완성되었어. 다해주고 나니 도련님이 남쪽의 왕은 왜 찾냐고 물어.

 

  “저는 저 너머 이름 없는 들에서 나고 자란 단이라고 합니다. 요즘 들어 집에서 기르는 새는 알을 낳지 않고, 들녘을 날아다니는 새들은 곡식을 쪼아먹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어 그 연유를 여쭙고자 가는 길입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집에서 기르는 새는 보잘것없는 밥만 먹고 몸이 상했으니 알을 낳지 못하는 거고, 들녘에 날아다니는 새들은 벌레를 잡아준 고마움도 모르고 곡식 한 톨 나눠주지 않으려고 내쫓으니 그렇지.”

 

  혹시나 했던 대로 이 도련님이 남쪽의 왕이었나 봐. 단이는 도련님이 하는 말을 머릿속에 꼭꼭 새겨두고 돌아가면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주기로 마음먹었어.

 

  “멍청한 건지, 독한 건지. 실이 불꽃으로 만들어진 걸 알면서도 맨손으로 그걸 천으로 짜? 고작 그거 물어보려고?”

 

  그제서야 단이는 제 손을 내려다봤어. 불로 만든 실에 쓸리고 까맣게 타 버린 천을 걷어내고 완성한 천을 챙기느라 손은 온통 물집투성이였어. 그래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이야기를 들었으니 단이는 만족하고 있었어. 도련님은 혀를 쯧 차더니 우물물 한 바가지 퍼다가 단이의 양손에 부었어. 차가운 우물물이 단이의 손을 거쳐 땅에 스며들자 단이의 손은 예전처럼 깨끗하게 돌아가 있었어.

 

  “미련하긴 해도 맡긴 일은 끝까지 해냈으니까 길 정도는 알려주지.”

 

  그리고는 얄팍한 보따리를 단이의 품에 안겨줘. 너무 가벼워서 들었는지 말았는지 헷갈리는 그런 보따리야. 단이가 그 안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 보기도 전에 어느 길을 가리키며,

 

  “이 길을 따라 아홉 절벽을 넘으면 숲 가꾸는 이가 있을 테니 거기 가서 동쪽의 왕을 만나러 가는 길을 물어.”

 

  하고는 언덕배기 새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 단이는 이번에도 허둥지둥 보따리를 봇짐에 잘 챙겨 넣고 허리 숙여 인사한 다음 다시 길에 올랐어.

 

 

 

  단이가 길 따라 아홉 절벽을 넘어가는데 이번에는 온갖 수생동물들이 몰려와서 단이의 발길을 방해하네. 작게는 가벼운 물벼락이었고, 크게는 수생동물들이 절벽에 몸을 부딪혀 절벽을 마구 흔드는 거야. 절벽 아래 흐르는 거친 물살에 단이는 특히 겁이 났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는 없었어.

  그렇게 아홉 절벽을 넘어가니 과연 하늘을 찌를 것처럼 큼직큼직한 나무들이 단이를 반겼어. 바스락바스락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들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지. 커다란 나무 사이를 돌아다니는데 저 멀리서 저랑 비슷해 보이는 소년이 보여. 연신 바닥을 더듬거리며 흙을 다독이는 것 같았어.

 

  “숲 가꾸는 작은 도련님, 동쪽에 사는 왕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이 숲에서 푸른 바늘을 찾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구백구십구 개 찾아내면 가르쳐 주지.”

 

  숲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고 바닥에 쌓인 나뭇잎도 그 깊이를 알 수 없었어. 그래도 어떡해. 길을 알려면 열심히 일해야겠지.

  단이는 이번에도 소매를 바짝 걷어붙이고 쪼그려 앉아서 나뭇잎 사이를 헤집기 시작했어. 연한 녹색의 나뭇잎부터 빨갛게 물든 나뭇잎, 노랗게 물든 나뭇잎, 갈색의 바삭바삭한 나뭇잎, 까맣게 죽은 나뭇잎까지 들추고 치우면서 사이사이 숨어 있는 푸른 바늘을 찾았어. 햇빛을 받으면 은은하게 빛나는 푸른 바늘 말고도 빛을 잃고 까맣게 된 바늘과 하얗게 바랜 바늘도 나뭇잎 사이에 숨어 있었어. 잠시도 쉬지 않고 아흐레 밤 아흐레 낮이 걸려서야 마침내 구백구십구 개의 푸른 바늘을 모두 찾아냈어. 다해주고 나니 작은 도련님은 동쪽의 왕은 왜 찾냐고 물어.

 

  “저는 저 너머 이름 없는 들에서 나고 자란 단이라고 합니다. 요즘 들어 곡식들이 자꾸만 쓰러지고 속이 썩은 나무들이 많아져 많은 사람이 곤란해하기에 그 연유를 여쭙고자 가는 길입니다.”

  “곡식들을 잘 구분해야지. 많은 물이 필요한 곡식이 있고, 그렇지 않은 곡식도 있는 법이니까. 게다가 곡식을 빼곡하게만 심는다고 해서 능사가 아닌데 욕심을 자꾸 부리니까 문제가 생긴 거야. 욕심내느라 숲도 마구잡이로 휘저으니까 나무도 금방 죽는 거야.”

 

  라고 하는데, 역시 이 작은 도련님이 동쪽의 왕이었어. 그런데 투덜투덜하는 모양새가 저와 같이 자란 동무들이랑 별반 다르지 않아 저도 모르게 웃음이 툭 터졌지 뭐야.

 

  “웃지 말고 얼른 제 갈 길이나 가.”

 

  그러면서 고운 푸른색의 복주머니 하나를 툭 던져줘. 단이가 그 속이 궁금해서 묶인 끈을 살짝 풀어 보려고 하는데 불쑥 얼굴을 들이민 작은 도련님이 말하길,

 

  “저쪽 길 따라서 아홉 바위산을 넘으면 약초 캐는 아가씨가 있을 거야. 가서 북쪽에 사는 왕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물어봐.”

 

  라고 하네. 그리고는 정성스럽게 복주머니의 끈도 다시 묶어줘. 단이는 아직은 안을 보면 안 되나 보다, 생각하면서 봇짐 속에 잘 챙겨 넣었어. 그리고 손을 흔들어 배웅해주는 작은 도련님에게 마주 인사하면서 길을 나섰어.

 

 

 

  단이가 길 따라 아홉 바위산을 넘어가는데 이번에는 아무도 방해하지 않아. 하지만 뺨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과 겨우 손과 발 디딜 곳이 전부인 아슬아슬한 길이 너무 고되게 느껴졌어. 세찬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저도 모르게 몸이 휘청거리는 통에 단이는 바위산에 찰싹 매달려서 겨우겨우 발을 옮겼지.

  그렇게 아홉 바위산을 넘어가니 여전히 바람은 날카롭고 차가웠지만, 끝도 모르게 펼쳐진 약초밭이 눈에 들어왔어. 흔하게 볼 수 있는 약초들부터 처음 보는 신기한 풀들이 한가득 자라 있었어. 그리고 그 사이에서 분주하게 약초를 캐고 있는 아가씨도 보였어.

 

  “약초 캐는 아가씨, 북쪽에 사는 왕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이 약초들로 환을 만들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구백구십구 개 만들면 가르쳐 주지.”

 

  아가씨가 가리킨 곳에는 종류별로 나눠진 약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어. 다들 하나같이 흙만 대충 털어낸 모양새인 게 아무래도 씻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모양이라, 단이는 이번에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약초를 조심스럽게 챙겼어. 약초밭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살얼음이 낀 개울이 흐르고 있었지. 단이는 살얼음을 툭툭 발로 깨서 자리를 만든 다음 조심스럽게 약초에 묻어 있는 흙을 씻어 내기 시작했어.

  살얼음이 끼어 있었던 만큼 개울물은 너무 차가워서 뼈마디가 쿡쿡 시려왔고 살은 꽁꽁 얼어붙었지만 일을 시작한 손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어. 약초를 모두 씻어내 잘게 다져두고 솥단지에 물을 붓고 마른 장작을 쪼개서 불을 피우고 다진 약초를 알맞게 집어넣은 다음 약이 될 때까지 커다란 주걱으로 솥을 휘저어 주고 마침내 꾸덕꾸덕한 약이 만들어지면 조금씩 퍼내서 동글동글 빚어내기까지 아흐레 밤과 아흐레 낮을 꼬박 지새우니 마침내 구백구십구 개의 환을 다 만들어 냈네. 한 알 한 알 정성스럽게 한지에 싸서 모아두니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지.

  이번에도 일이 다 끝나고 나서야 아가씨가 북쪽의 왕은 왜 찾냐고 물어봐.

 

  “저는 저 너머 이름 없는 들에서 나고 자란 단이라고 합니다. 요즘 들어 물고기들이 잘 잡히지 않고, 물에 가라앉는 배들이 자주 생겨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어 그 연유를 여쭙고자 가는 길입니다.”

  “이런! 약이 늦어지는 바람에 사람들이 안 해도 될 고생을 하고 있군! 미안하다. 용왕의 어린 아들이 힘을 뽐내려고 몸부림치다가 다치면서 여러 군데 화를 내는 바람에 모두 벌어진 일이니 이 약들을 보내주고 나면 곧 괜찮아질 거다.”

 

  호탕하게 웃는 아가씨의 모습을 보고 단이는 길을 나선 이래 처음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어.

그렇게 궁금한 것도 다 해결되고 마음이 놓이니까 이제야 따끔따끔 손이 아픈 게 느껴지기 시작해.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을 샅샅이 훑어 바늘을 찾으면서 이리 찔리고 저리 찔린 손을 살얼음 낀 차디찬 개울물에 몇 번이고 담갔다가 빼고 약을 젓느라 혹사했으니 손이 온통 터지고 갈라질 수밖에.

  단이의 손을 본 아가씨는 가장 작은 환 하나를 반으로 쪼개서 단이 입에 쏙 넣어줬어.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린 환은 알싸하고 시원한 향과 함께 목뒤로 넘어갔지. 그러자 퉁퉁 부르터서 따끔거리고 쓰라리던 손이 예전보다 더 곱게 돌아왔어.

  단이가 새하얗게 변한 손에 감탄하고 있을 때, 아가씨는 검은 복주머니와 약간 묵직해 보이는 보따리 하나를 내밀었어. 단이가 어리둥절해하면서 바라보니,

 

  “저쪽 길을 따라 계속 걷다 보면 네가 할 일이 보일 거다.”

 

  라면서 아가씨가 단이의 등을 툭툭 떠밀어. 단이는 별다른 말도 못 해보고 검은 복주머니와 보따리를 끌어안은 채로 아가씨가 알려준 길을 따라 걸었어.

 

 

 

  약초밭을 지나고 푸릇푸릇한 풀밭을 지나 길은 서서히 달라졌어. 풀이 자라 있긴 했지만 누렇게 변해 있었고, 조금 더 걷자 바짝 마른 풀이 보였고 또 얼마간 걷고 나니 풀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마른 땅이 나타났어. 푸석푸석 물기 하나 없이 메마른 땅에는 작은 자갈들만이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지.

황량한 땅의 모습에도 단이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걸어 나갔어. 그리고 마침내 하늘 아래 앞도 뒤도 메마른 땅밖에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마침내 단이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았어.

  메마른 땅 한 가운데에는 시들시들한 꽃 몇 송이와 그걸 지키는 것처럼 앉은 채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이 있었던 거야. 꽃들은 생기를 점점 잃고 있긴 했지만 어디서도 본 적도 없는 신기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었지. 꽃을 자세히 보기 위해 다가갔더니,

 

  “넌 누구지?”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눈을 감고 있는 남자에게서 흘러나왔어. 어찌나 차갑고 단단한지, 살얼음 낀 개울물보다도 더한 한기가 느껴졌어. 단이는 제자리에 멈추어 섰어. 꼭 목소리가 두 발을 꽁꽁 얼린 것처럼 말이야. 그래도 두 눈을 꼭 감고, 두 손을 꼭 쥔 다음 큰 소리로 외쳤어.

 

  “저, 저는 저 너머 이름 없는 들에서 나고 자란 단이라고 합니다! 북쪽의 왕께서 여기에 제가 할 일이 있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단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꺼풀이 열리며 드러난 눈은 탁한 잿빛으로 물들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고 있었어. 남자는 한참이나 말없이 단이만을 가만히 바라봤어. 단이는 남자의 시린 눈빛에 잠시 움츠러들었지만 이내 허리에 힘을 주고 꼿꼿하게 몸가짐을 바르게 했어.

그러자 남자가 처음보다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해.

 

  “이 꽃들을 살리어 구백구십구 송이 꽃을 피우는 게 네가 할 일이다.”

 

  단이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들고 있던 보따리와 매고 있던 봇짐을 땅에 내려놓으려고 하니까 어디선가 한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세 쌍의 손을 쑥 내밀어.

 

  “짐은 절 주시고 따라오세요!”

 

  단이가 자기도 충분히 들 수 있으니 길만 안내해 달라고 하자 아이는 손을 거두고 앞장서서 걸어가. 아이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단이도 서둘러서 성큼성큼 쫓아갔지.

  아이를 따라 도착한 곳에는 번듯한 초가집 한 채가 서 있었어. 청소도 말끔히 되어 있었고, 멀지 않은 곳에서는 온천수가 퐁퐁 솟아나고 있었고, 반대쪽에는 차가운 개울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지. 이때까지 하늘을 이불 삼아 땅을 베개 삼아 지내오던 단이가 보기엔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좋은 곳이었어. 하지만 단이는 좋은 집보다도 앞으로 키워야 할 꽃이 더 신경 쓰였어. 이제까지 꽃을 키워본 적이 있어야지.

  단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집까지 자신을 안내해준 아이를 붙잡고 꽃 키우는 방법을 물었어. 그러자 아이가 활짝 웃으면서

 

  “꽃들이 성미가 까다로워 키워주는 사람도 가리고 물도 가리고 비료도 가린답니다. 매일 목욕재계하고서 아침에는 아침 약수 한 방울, 점심에는 점심 약수 한 방울, 저녁에는 저녁 약수 한 방울을 때마다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뿌려주고 광에 있는 환을 똑같이 나누어 사흘에 하나씩 뿌리 근처에 묻어줘야 합니다.”

 

  라고 하네. 단이는 그 자리에서 아이에게 몇 번이고 확인을 거듭해 꽃 키우는 법을 완전히 기억하고 나서야 겨우 집 안에 들어와 보따리와 봇짐을 내려놓고 잠이 들었어.

  다음날부터 단이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초가집 뒤편에 있는 돌거북이 떨어트리는 약수를 받아다 정성껏 부어주었어. 어르신이 챙겨준 작은 박 바가지는 약수를 받기 딱 좋았지. 도련님이 안겨준 가벼운 보따리 속에 든 가벼운 옷 덕분에 단이는 늘 말끔한 차림새였고, 함께 들어 있던 신발은 몸을 한결 가볍게 해서 빨리 걸을 수 있게 해줬어. 작은 도련님이 준 푸른 복주머니 안에는 작은 단도가 들어 있어서 사흘에 한 번씩 꽃에 줘야 하는 환을 쪼개는 데 도움이 되었지. 아가씨가 준 검은 복주머니에 든 동글동글 손톱보다 작은 환은 힘들 때 하나씩 꺼내 먹으면 기운이 났어.

  그렇게 아흔 아흐레 밤과 아흔 아흐레 낮을 꼬박 꽃에 정성을 쏟아 붓자 마침내 모든 꽃이 생생하게 살아나면서 구백구십구 송이보다 더 많은 꽃이 천지에 만발했어.

그 사이 박 바가지도, 옷과 신발도, 단도도 전부 고생해서 많이 상했지만 단이는 이렇게나 아름다운 광경은 처음이었고, 이 광경을 만드는 데에 자신이 힘썼다는 사실 자체로도 뿌듯해서 하나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한참이나 한들한들 흔들리는 꽃을 바라보고 있던 단이의 머리 위로 커다란 손이 그늘을 만들었어. 아흐레 밤과 아흐레 낮 동안 단이의 행동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어딘가로 사라졌던 남자였어. 단이는 남자를 바라보며 세상에 둘도 없이 맑고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어.

 

  “정말 예쁜 꽃이에요!”

  “...그래, 대단하군.”

  “이 꽃들은 뭔가요?”

  “운명을 정하는 꽃이고, 세상을 밝히는 꽃이고, 목숨을 살리는 꽃이지.”

 

  단이는 제가 키워낸 꽃이 그렇게 대단한 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해서 두 눈이 땡그래졌어. 남자는 허리를 숙여 색색의 꽃을 하나씩 꺾더니 단이의 품에 안겨줬어. 그리고는 이제까지 단이가 머물렀던 초가집 방향을 가리키며 말해.

 

  “이제 돌아가도록. 네가 걱정하던 일은 모두 해결되어 있을테니.”

 

  그 말을 끝으로 남자의 새카맣고 지저분하던 모습은 순식간에 벗겨지며 오색 찬란한 모습으로 바뀌더니 하늘 끝 저편으로 사라졌어.

 

 

 

  단이는 한참이나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 받은 꽃을 소중히 감싸 쥐고 길에 올랐어. 정이 든 초가집 마루에는 새 옷과 새 신, 말짱해진 단도, 검은 복주머니, 정체불명의 보따리가 놓여 있었어. 단도는 품에 챙기고 꽃과 검은 복주머니, 보따리까지 봇짐에 잘 챙기고 새로운 옷과 신으로 갈아입고 나니 발걸음은 더할 나위 없이 가볍게 느껴졌어.

  천지신명이 도우심일까, 여기까지 올 때 느꼈던 힘든 길 대신 보드랍고 폭신한 흙으로 된 길만이 이어졌어. 그리고 천 리가 백 리처럼, 백 리가 십 리처럼 가깝게 느껴졌지. 단이는 그렇게 훨훨 나는 기분으로 빠르게 자신이 살았던 들로 돌아왔어.

  들에는 어느새 번듯한 초가집이 지어져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틈만 나면 단이가 언제나 올까 하고 언덕에 올라 주변을 살피고 있었던 거야.

 

 

 

  이후로 단이는 제가 나고 자란 들에서 사람들과 동물들과 어울려서 행복한 세월을 보냈대.

검은 복주머니에 든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작은 환약과 정체불명의 보따리 안에서 나온 약수가 든 호리병 덕분에 단이는 아프지도 않고 정해진 수명만큼 건강하고 즐겁고 행복한 삶을 보냈다고 해.

  가져왔던 색색의 꽃들을 쓰면 더 오랫동안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단이는 그 꽃들을 그저 울타리 아래에 심고 매일매일 정성껏 보살폈다고 해. 그래서 그런가, 단이가 먼 길을 떠나는 날에 그 꽃들도 바람 타고 날아가 단이가 걸어갈 길을 장식했다고 하더라고.

00:00 / 02:02
bottom of page